"소는 대지의 덕을 받은 동물이라 저리 무거운 것도 능히 견디는 영물이니라"
제가 9살때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입니다. 명리학을 공부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지나가는 말로 여러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는데, 오늘 그 기억은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시골 할아버지댁 옆 집에는 우사가 있었습니다. 소를 키우는 곳인데 규모가 크진 않았고 거기도 나이가 좀 있으신 아저씨께서 취미삼아 소를 키웠더랬죠. 소가 두마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중 한마리가 유독 덩치가 크고 뿔이 대단히 굵었습니다. 사람들끼리도 키 차이나 덩치차이가 있으니 뭐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하곤 했었는데, 나중에 아저씨께서 말씀해주시기로 그 소는 싸움소라는 겁니다.
싸움소를 직접보신분들이 많을지 적을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9살 꼬맹이가 보는 그 소는 그냥 소가 아니었습니다. 서유기 속 최강자인 손오공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인물인 우마왕의 모토가 왜 소였을까라는 의문이 그 때 풀렸죠. 이만한 소라면 싸움으로 득도한 손오공과도 해볼만하겠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슬쩍 슬쩍 몸을 움직일때마다 지축이 울리는것 같은 착각, 가끔씩 그 두터운 목을 투레질할때마다 뿜어지는 콧김, 오래된 칡의 거대한 뿌리를 억지로 꼬으고 꼬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박아넣은듯한 뿔. 노자가 소를 타고 서역으로 향했다는데, 이 정도 소는 되어야 그런 여정이 든든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저는 신화에 나오던 소가 제 눈앞에 현신한 것 같은 착각을 하곤했었죠.
철모르는 꼬맹이가 그 압도적인 위용을 지닌 생명체에게 반해버리는것은 드문 일이 아닐겁니다. 자주 밖으로 나와 동네를 걸어다니던 그 소와 친해지고 싶어 매일매일 그 집에 가서 소가 먹는 풀도 줘보고 급식으로 받아온 우유팩도 쏟아주고 그랬습니다. 소는 그 큰눈으로 저를 한 번도 제대로 쳐다봐주지 않았습니다만, 그런것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놈이 너를 좋게보니까 네가 등을 쓸어도 가만히 있는거라는 아저씨의 말에 저는 더 열심이었죠. 소가 가장 좋아하는게 꼬리가 닿지않는 목뒤와 허리부근을 긁어주는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막대기에 솔을 붙여서 긁어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소는 하나의 산이었습니다. 우사를 나와 움직이는걸 바로 옆에서 볼때면 작은 산 하나가 뽑혀서 걸어다니는 것 같았거든요. 처음에는 저보고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던 아저씨도 나중엔 소에게 가까이 가는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엄청 무거운 타이어를 질질끌면서 걸어다는걸 제가 근처에서 따라다니다가, 그 소가 쉴때면 가서 물도 주고 등도긁어주고 그랬거든요.
그 소가 몇살이었는지는 제가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장강이라고 불렀던것 같은데 이것 역시도 정확하진 않습니다.
확실한건 장강이는 아직 싸움소로서 데뷔전을 치르지 않았다는것. 제가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건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던차에 어느 날인가 큰 트럭이 와서 그 소를 실으려고 하는 모습을 제가 집오는길에 보게됩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의 불운한 직감은 여지없이 들어맞는다는 경험을 그 때 처음 해본것 같습니다. 장강이가 팔려가는것이었거든요. 제가 뛰어가서 별 말도 못하고 울먹이고 있으니까 아저씨께서 그러시더군요.
"울지말거라. 장강이 이놈을 좋게 본 분이 잘 키워보겠다고 데려가는거란다. 싸움소로 태어났으니, 오히려 더 오래살게다."
장강이가 큰 트럭위로 올라오지 않으니까 어른 두셋이서 위로 올려끄는데 저는 장강이가 그 힘을 버티고 버텨서 영원히 이곳에 터박기를 바랐습니다. 철모르는 꼬맹이의 이기심이었습니다만, 제 바람이 이루어질것도 같았네요.
그 거대한 몸이 겨우 장정 두셋에 끌려질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 역시도 문제인것이, 사람힘도 못이기면 싸움소로 태어난 녀석이 앞으로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저는 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그냥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크게 우는것도 아니고 팔지말라고 떼쓸수도 없고 그냥 그 소를 다신 못본다는 생각때문에요. 그렇게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있는데... 그 두툼한 장강이의 목덜미가 슬쩍 돌아가더니 저를 쳐다보더군요.
아마도 그게 그 녀석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눈맞춤이었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니, 일개 축생의 지능이나 생각이 사람의 궤를 넘을 수 없다는 말이 분명 현실이고 사실이겠지만.
그 때 저는 그 크고 우묵한 소의 눈에서 감정을 엿보았습니다. 저같은 꼬맹이의 그저 여물지못한 슬픔이 아니라 뭐랄까요.
'사내들의 이별에 눈물이 길면 추한법이다'
분명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그 거대한 숫놈의 우묵한 눈과 한번의 투레질은 저에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저보다 성숙했던 이별에 대한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 우물같이 큰 눈이 천천히 다시 앞으로 돌아갈 때엔 이미 거대한 몸이 트럭에 올라서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장강이라는 싸움소는 마을을 떠났고 그 뒤 소식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날 저녁, 팔려가는 소가 주인아저씨와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애초에 성질이 유순한 놈들이라 그 큰 눈에도 원한을 깊이 간직하지 못한다고요.
그게 당시에 위로가 되었는지 어땠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
단지 싸움소에 대한 저의 모든것들은 이 기억 하나로 남아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