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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소에 대한 기억

by 강다로 Mar 02. 2025

"소는 대지의 덕을 받은 동물이라 저리 무거운 것도 능히 견디는 영물이니라"

제가 9살때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입니다. 명리학을 공부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지나가는 말로 여러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는데, 오늘 그 기억은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시골 할아버지댁 옆 집에는 우사가 있었습니다. 소를 키우는 곳인데 규모가 크진 않았고 거기도 나이가 좀 있으신 아저씨께서 취미삼아 소를 키웠더랬죠. 소가 두마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중 한마리가 유독 덩치가 크고 뿔이 대단히 굵었습니다. 사람들끼리도 키 차이나 덩치차이가 있으니 뭐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하곤 했었는데, 나중에 아저씨께서 말씀해주시기로 그 소는 싸움소라는 겁니다.

싸움소를 직접보신분들이 많을지 적을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9살 꼬맹이가 보는 그 소는 그냥 소가 아니었습니다. 서유기 속 최강자인 손오공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인물인 우마왕의 모토가 왜 소였을까라는 의문이 그 때 풀렸죠. 이만한 소라면 싸움으로 득도한 손오공과도 해볼만하겠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슬쩍 슬쩍 몸을 움직일때마다 지축이 울리는것 같은 착각, 가끔씩 그 두터운 목을 투레질할때마다 뿜어지는 콧김, 오래된 칡의 거대한 뿌리를 억지로 꼬으고 꼬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박아넣은듯한 뿔. 노자가 소를 타고 서역으로 향했다는데, 이 정도 소는 되어야 그런 여정이 든든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저는 신화에 나오던 소가 제 눈앞에  현신한 것 같은 착각을 하곤했었죠.

철모르는 꼬맹이가 그 압도적인 위용을 지닌 생명체에게 반해버리는것은 드문 일이 아닐겁니다. 자주 밖으로 나와 동네를 걸어다니던 그 소와 친해지고 싶어 매일매일 그 집에 가서 소가 먹는 풀도 줘보고 급식으로 받아온 우유팩도 쏟아주고 그랬습니다. 소는 그 큰눈으로 저를 한 번도 제대로 쳐다봐주지 않았습니다만, 그런것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놈이 너를 좋게보니까 네가 등을 쓸어도 가만히 있는거라는 아저씨의 말에 저는 더 열심이었죠. 소가 가장 좋아하는게 꼬리가 닿지않는 목뒤와 허리부근을 긁어주는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막대기에 솔을 붙여서 긁어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소는 하나의 산이었습니다. 우사를 나와 움직이는걸 바로 옆에서 볼때면 작은 산 하나가 뽑혀서 걸어다니는 것 같았거든요. 처음에는 저보고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던 아저씨도 나중엔 소에게 가까이 가는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엄청 무거운 타이어를 질질끌면서 걸어다는걸 제가 근처에서 따라다니다가, 그 소가 쉴때면 가서 물도 주고 등도긁어주고 그랬거든요.

그 소가 몇살이었는지는 제가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장강이라고 불렀던것 같은데 이것 역시도 정확하진 않습니다.

확실한건 장강이는 아직 싸움소로서 데뷔전을 치르지 않았다는것. 제가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건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던차에 어느 날인가 큰 트럭이 와서 그 소를 실으려고 하는 모습을 제가 집오는길에 보게됩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의 불운한 직감은 여지없이 들어맞는다는 경험을 그 때 처음 해본것 같습니다. 장강이가 팔려가는것이었거든요. 제가 뛰어가서 별 말도 못하고 울먹이고 있으니까 아저씨께서 그러시더군요.

"울지말거라. 장강이 이놈을 좋게 본 분이 잘 키워보겠다고 데려가는거란다. 싸움소로 태어났으니, 오히려 더 오래살게다."

장강이가 큰 트럭위로 올라오지 않으니까 어른 두셋이서 위로 올려끄는데 저는 장강이가 그 힘을 버티고 버텨서 영원히 이곳에 터박기를 바랐습니다. 철모르는 꼬맹이의 이기심이었습니다만, 제 바람이 이루어질것도 같았네요.

그 거대한 몸이 겨우 장정 두셋에 끌려질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 역시도 문제인것이, 사람힘도 못이기면 싸움소로 태어난 녀석이 앞으로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저는 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그냥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크게 우는것도 아니고 팔지말라고 떼쓸수도 없고 그냥 그 소를 다신 못본다는 생각때문에요. 그렇게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있는데... 그 두툼한 장강이의 목덜미가 슬쩍 돌아가더니 저를 쳐다보더군요.

아마도 그게 그 녀석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눈맞춤이었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니, 일개 축생의 지능이나 생각이 사람의 궤를 넘을 수 없다는 말이 분명 현실이고 사실이겠지만.

그 때 저는 그 크고 우묵한 소의 눈에서 감정을 엿보았습니다. 저같은 꼬맹이의 그저 여물지못한 슬픔이 아니라 뭐랄까요.
'사내들의 이별에 눈물이 길면 추한법이다'

분명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그 거대한 숫놈의 우묵한 눈과 한번의 투레질은 저에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저보다 성숙했던 이별에 대한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 우물같이 큰 눈이 천천히 다시 앞으로 돌아갈 때엔 이미 거대한 몸이 트럭에 올라서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장강이라는 싸움소는 마을을 떠났고 그 뒤 소식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날 저녁, 팔려가는 소가 주인아저씨와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애초에 성질이 유순한 놈들이라 그 큰 눈에도 원한을 깊이 간직하지 못한다고요.

그게 당시에 위로가 되었는지 어땠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

단지 싸움소에 대한 저의 모든것들은 이 기억 하나로 남아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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