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부녀가 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친구들 모임에 나가지 못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불륜은 사생활인데 그걸로 사회적인 삶을 멈추어야 할까?’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그랬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게 소문이 나고 사교계에 나가 지탄을 받는다. 안나는 이혼하기도 무척 힘들었는데 남편이 ‘불륜을 할지라도 소문이 나지는 말게 하라’고 말하며 이혼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와 이혼하지 않는 남자는 상황 판단력이 모자란다고 할 것이다.
안나는 공적인 신분이 높은 윤리적인 남편과의 삶에 만족하고 어린 아들을 사랑하는 정숙한 유부녀였다. 그러나 한순간 잘생긴 젊은 군인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 위험한 불륜에 빠진다.
안나가 사랑한 젊은 러시아 장교 블론스키는 술과 도박을 즐기고 여러 여자를 희롱하고 윤리보다는 본능에 따라 사는 육체적인 남자이다. 남편과의 품위 있고 윤리적이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던 안나에게 블론스키는 일상을 뒤바꾼 열정적인 남자이다. 안나는 순식간에 사랑의 열정에 빠져 삶의 기쁨을 느낀다.
블론스키는 자신의 쾌락적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거의 모든 러시아 귀족들이 그러하듯 빚을 많이 지고는 미망인인 어머니의 유산을 바라보고 산다.
반면 영화 초반 블론스키가 거절한 귀족 아가씨 키티는 시골의 귀족 남자 료빈의 청혼을 거절한다. 수줍고 소박한 료빈은 키티에게 거절당하자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산다. 하지만 블론스키에게 거절당해 깊은 상처를 입은 키티는 시간이 흘러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뜨고 료빈의 소박한 시골 생활을 받아들인다. 안나와 블론스키의 화려하지만 부패한 도시에서의 사랑과는 대비된다.
여기에서 톨스토이 원작 ‘안나 카레니나’ 소설의 위대한 점이 드러난다. 원작은 직접 몸을 써서 농사를 짓고 당시 러시아의 농민들과 함께 일하는 러시아 귀족 료빈을 적지 않은 분량으로 그린다. 어머니의 유산만 바라보고 살며 쾌락적인 일상을 보내는 블론스키와 달리 몸으로 부를 일구는 소박한 료빈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톨스토이 원작은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 러시아 정교와 같은 종교, 부패한 귀족의 모습, 소박하고 진실한 농부의 삶을 광범위하게 그림으로써 단순한 불륜 막장극이 아닌 위대한 명작으로 호칭된다.
내가 본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2013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와는 달리 연극적 무대 장치로 장면 전환을 시킴으로써 방대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했다. 톨스토이가 쓴 원작을 이렇게 2시간으로 압축한 점도 놀라운 점이다.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키이라 나이틀 리가 안나 역을 맡고 주드로가 윤리적인 남편 카레린을 그리고 애런 존슨이 잘생긴 블론스키를 맡아 눈호강을 시켜준다. 연극적인 연결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라 금방 익숙해지진 않지만 일단 이해가 되니 정교한 구성으로 감독의 천재성이 느껴진다.
사실 블론스키는 안나와 사랑에 빠진 후 특별히 불충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유산을 바라는 입장이라 정당한 결혼을 바라는 어머니를 거역하기는 어려울 뿐이었다. 다만 안나는 사회생활에 나가지 못하고 남자만 있는 좁은 공간에 갇혀야 했고 그게 그녀의 질투를 키우고 숨을 막히게 했다.
안나는 남편이나 애인의 돈 없이는 살 수도 없는 귀족 여자였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지만 그걸 받쳐주는 남자의 돈이 없으면 바로 하녀로 급전직하할 자리에 있다. 블론스키가 자신을 버리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야 하는 게 당연했던 거다. 하녀로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중세 신분 사회의 마지막 열차칸에 있었던 톨스토이가 살던 러시아 당시 여성의 삶이란 화려한 귀족 여성일지라도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고 살 수 있는 요즘 여성들이 좀 더 솔직하게 살아가게 된 건 불과 150년이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