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이제 아무도 종이를 말아 표류를 고백하지 않는다
정처 없이 사랑하는 마음
그런 건 유행이 지났으니까
자라는 것을 생각한다
숲의 한가운데서 시작되는 여름처럼
나의 성장에 대해 말해 보자면,
방위를 모르는 지도 한 귀퉁이에 서툴게 너와 나의 이름을 엮어서 ‘우리’라고 쓰는 버릇이, 그런 비슷한 슬픈 일들이 많아지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고 말하며 점점 둥글고 환해졌다. 느리고 성실하게. 또한 간결하게. 다 자란 것들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고 믿으면서.
집을 짓는 꿈을 꾸었다. 투명하고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집. 네가 흐린 얼굴을 하고서,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창문을 크게 만들지 마.”
우리가 자라는 동안 좁은 창문으로 어떤 장면을 보는 게 좋을지. 가령 녹색의 이파리들이 쏟아지는 장면이나 아무도 영영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는 장면. 잘 자라기 위한 집은 좋은 냄새가 나야 했다. 죽은 자들이 창문에서 쉼 없이 떨어지고 있더라도.
죽을 때까지 자라는 소년에 대한 괴담이 있었다. 그 소년의 끔찍한 최후를 말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너는 웃으며 몸서리를 쳤다. 무섭고 징그러워. 웃는 목소리.
내 이마에 너의 시선이 닿았다. 너의 그 둥근 눈동자마저도 누군가 만져서 만들었다. 그런 것들을 알아차릴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자란 만큼 병이 든 네가 내 손을 잡았다. 네가 병이 든 만큼 가벼워질까 봐 두려웠다. 말도 배우지 않고 걷는 나쁜 피. 네 손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것들을 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