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의 힘줄이 끊어지는 듯이 저릿저릿했다. 몹시 단단하고 팽팽하게 다리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새벽 5시에 있을 예불 시간에 참여하고자 법당에 내려갔다.
절을 하고 나면 좀 나아질까 기대했건만 통증은 그대로였다.
늘 맛있게 먹던 아침 공양도 무슨 맛인지 모를 정도로 입맛이 없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느껴지는 통증들이 몹시 거북해 넓은 법당을 천천히 거닐었다.
법당을 몇 바퀴째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한 자리에 서서 스트레칭도 해 보았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한쪽 다리로 서서 오른쪽 다리를 하염없이 털기도 하고…….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아 손으로 주무르고 문지르고 주먹으로 두들겨도 보았지만 쉽사리 증상이 가시지 않았다.
오후에는 가부좌의 자세로 경전을 펴서 읽는데 허리는 또 왜 이리 불편한 건지…….
경전을 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허리까지 말썽이라며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거냐고!’
몸을 돌보지 않은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건지 하루 종일 몸의 통증에 놀아나는 내 모습이 서글프면서도 씁쓸했다.
한편으론 이런 내가 얼마나 우습던지…….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몸이 많이 아프고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몸 보다 마음이 더 많이 아팠다.
마음의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월등히 심했기에 몸의 고통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몸이 보내오는 신호들이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몸을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정 자세로 앉아 소리 내어 경전 읽기에 몰입했다.
나를 미치게 하는 생각들을 잊고자 몸을 더욱 활용했고 그것에 매달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내면의 감정들이 차츰 불길을 멈추었다.
그러한 감정들이 사그라들고 마음에 어느 정도 평온이 찾아오니 이젠 몸을 갖고 난리다.
몸의 통증을 가지고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지금 더 나빠진 게 아니었다.
그때도 분명히 아팠는데 마음의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앞서 있었다.
그래서 육체적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가 마음의 고(苦)가 사라지니 또 다른 고(苦)에 마음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괴로움이 나으니 또 다른 괴로움을 찾아 나선다.
괴롭고 싶지 않다 하면서도 늘 데리고 살던 대로 또다시 괴로움을 찾는다.
마치 어릴 적부터 안고 자던 곰인형이 있어야 편안하게 잠드는 것처럼 괴로움이란 녀석도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에 스며든 습관적 친구라도 된 걸까.
그래서 깨어있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옳지 못한 마음의 습관을 떼어내기 위해서!
괜한 것에 시비하고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 발걸음의 철학
살면서 내가 딛는 걸음걸음을 온전히 느껴본 적이 있을까?
‘걸음’ 자체가 목적이 된 경우 말이다.
회사를 출근할 때, 약속된 모임에 가기 위해, 여행 중에도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심지어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걸음을 떼지 않는 날이 없다.
하루 몇 걸음을 내딛는가의 차이만 있지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매일 걸음을 옮긴다.
목적지가 어디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딛는 걸음 자체에 주의를 둔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걷기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저녁 수행 프로그램에서 걷기 명상이 진행되었다.
‘걷기 명상?! 그건 또 뭘까?’
처음 해 보는 수행법에 호기심을 가지고 진행하시는 법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단전 아래 두 손을 모으세요. 시선은 2m 정도 앞에 고정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시선을 그곳에 두는 것은 다른데 마음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 발씩 옮기며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을 느껴보세요. 마음이 편안한 속도로 빠르거나 느리지 않도록 움직여 보세요. 오로지 내딛는 걸음에만 의식을 두고 걷습니다.”
천천히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의 감각에 집중해본다.
발가락, 발등, 발꿈치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느껴본다.
내 발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기분이랄까.
옮기는 발걸음에 내가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한 발, 한 발, 한 발…….
걸음에 마음이 머무는 사이 가슴엔 평화의 강이 흐른다.
굳게 닫혀 있던 입가엔 평온한 미소의 문이 열린다.
속세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건대
한 눈을 팔지 않고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만 온전히 마음을 두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하루 중에도 기껏해야 몇 시간일 뿐, 온종일 마음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는 시간들이 허다했다.
밥을 먹으며 핸드폰을 보고,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길을 걸으면서도 한참 지나온,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을 유영하곤 했다.
지나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붙들려 화를 일으키고, 며칠 뒤 발표할 프레젠테이션에 걱정의 무게를 먼저 짊어지고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땐 걸음에만, 밥을 먹을 때는 먹는 것에만 집중하며 지금 내가 하는 행위에만 마음을 데려다 놓으면 될 것을, 복잡한 생각과 망상 속에 괴로워하며 지금의 순간을 허비했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아까운 생을 대부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금, 여기’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삶이 괴롭지도, 아프지도 않을 텐데…….
삶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텐데…….
걱정과 불안, 분노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무심코 행하는 호흡 하나, 걸음 하나에 그 즉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배운 시간이다.
내가 딛는 걸음이 내게 말을 건네 온다.
발걸음의 철학이 되어.
# 내가 웃지 못했던 이유
“나이만큼 활짝 웃으세요.
하루에 얼마나 웃는지 매일 기록해 보십시오.”
오늘 아침 스님이 주신 지침이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좀 더 밝고 더 많이 웃기를 바라셨나 보다.
그 말씀 한마디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예전에는 잘 웃는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는데…….’
잘 웃어서 좋다고,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던 내 얼굴에 어느새부턴가 웃음기가 말라갔다.
그래도 일을 할 때는 비교적 밝은 웃음을 띄울 수 있었다.
해야만 했고, 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렵거나 불편한 마음이 드는 상황과 상대 앞에서는 좀처럼 웃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밉거나 싫은 사람 앞에서도 웃어야 돼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야 인사평가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내가 봐도 그런 사람이 유리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도 굳이 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감정적으로 불쑥 화를 내거나 차갑게 대하지만 않으면 될 뿐이라 생각했다.
사회생활에서 웃지 못함, 아니 ‘웃지 않음’으로써 오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좀처럼 내키지않는 일이었다.
거짓 웃음과 미소는 맞지 않는 갑갑한 가면을 억지로 쓰고 있는 것처럼 몹시도 불편한 것이었다.
절에 들어와 살면서 수행을 하고 내면을 살펴보다 보니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남들은 잘하는데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유독 왜 그리 힘든 걸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정말 알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그 이유를 알 때까지….
아침부터 줄곧 이 생각을 화두로 붙잡고 있었다.
예불 시간에도, 수행 시간에도, 참선할 때에도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진짜 이유를 파고들었다.
‘바로 그거였구나!’
절을 하다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현듯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번쩍 하고 날아든 순간이었다.
내가 웃지 못했던 건 내 마음이 현재에 있지 못하고 과거의 일이나 사건에 대한 감정에 끄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나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했다 하더라도 이미 지나가고 없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문제가 될 수 없는, 평온함만이 존재하는 ‘이 순간’에 머물고 있다면 웃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든 게 지금, 여기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늘 강조해 온 것이거늘,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었던 것을…….
이 단순한 진리를 지키지 못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 여기, 현재에 깨어있기’가 전부였다.
내면을 들여다보자 오랫동안 나를 시름하게 했던,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해묵은 숙제가 단박에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