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면 너무 외롭지 않겠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외로움에 몸서리 칠 지경이 되면 강아지나 한 마리 키우면서 정 붙이고 살면 된다.’고 말을 했다. 마루를 키우게 되기 전의 일이고 잘 몰랐던 때의 말이었다.
퇴근을 하고 불이 꺼진 현관에 들어설 때 싸늘한 냉기만 몸을 감싸면 나를 맞이해 줄 이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민다. 꼬리를 붕붕 돌리며 나를 반겨주는 하얗거나 누렇거나 혹은 검은 털 뭉치들을 떠올리는 것은 누군가에겐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 사람을 들이는 것보다 동물을 들이는 편이 간편하므로 그중 많은 수가 그들의 위로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들의 성가심이 되어서 거리에 버려지기도 한다. 강아지를 집에 들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동생이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오고 그와 가족이 되면서 강아지를 키우며 혼자 사는 삶이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루를 돌보는 일은 그를 사랑하는 크기와 별개로 꽤 귀찮은 일이었다. 오늘도 몸살에 걸린 엄마를 대신해서 아버지와 나, 둘 중 ‘누가 마루 산책을 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신경전을 치렀다. 발레수업에 가야 하는 나는 엄마에게 ‘수업에 다녀와서 마루를 산책시키겠다.’고 했지만 마루는 내가 한 시간쯤 뒤에 돌아와 자신을 공원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으니 아픈 엄마를 계속해서 졸라댔다. 결국 아버지가 짧은 산책을 시키고 발레수업에 다녀온 내가 다시 긴 산책을 다녀왔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은 부모님과 내가 공동육아를 해야 하는 아기가 한 명 생기는 일이었다.
강아지를 키우기 전 까지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손이 많이 가고 돈이 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료도 사야 하고 병원도 가야 하니 마루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마루와 나는 하루에 8시간 이상을 떨어져 있다. 내가 자취를 했다면 마루는 그 긴 시간 동안 혼자였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서 마루가 혼자서 집을 지키는 시간은 길지 않다. 또 부모님과 경제적 활동이나 돌봄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마루를 양육하는 부담도 덜하다.(사실 부모님이 대부분의 돈을 내고 돌보고 있다. 어쩌면 나까지도.)
퇴근 후 친구와 수다를 떨며 맥주 한잔을 하고 싶다면 어떨까? 강아지는 하루에 절반이상을 현관문 앞에 앉아 오로지 주인만을 기다리며 보낼 것이다. 하루의 절반을 개들의 시간으로 계산하자면 3일 정도가 된다. 누군가가 고작 맥주를 한잔 마시며 친구와 수다를 떠는 시간의 길이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기다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개는 개다. 귀엽고 위로가 되지만 개가 주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잘 먹고 잘 싸는 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다 당신의 차지가 된다. 매일 배변 판을 씻고 한 시간 이상 산책을 나가야 하는 것.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예방 접종을 하고 발톱을 깎이거나 위생미용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돈을 할애할 것을 요구했다.
내년에 독립을 하게 되면 또 강아지를 키우게 될까? 그러고 싶지만 아마도 못할 것이다. 나는 혼자서는 그것들을 해낼 자신이 없다. 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낼 그들에게 미안해서 선뜻 그들을 내 공간에 들일 수가 없을 것 같다.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 겪는 많은 성가심에도 불고하고 마루를 키우는 이유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가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루에게서는 따뜻한 생명의 냄새가 난다. 그것이 불안해서 잠 못 들었던 많은 밤들을 넘기게 해 주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3년 반 동안 취업시험을 준비했다. 친구들은 직장인 5년 차, 대리이거나 곧 대리를 바라보는 나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불안감은 어둠이 번지듯이 나를 좀먹었다. 바닥에 머리만 붙이면 잠들던 나에게 불면증이 생겼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수가 없으니 목표량을 채워 공부를 하지 못했다. 또, 공부를 못하니 불안감이 커져서 잠을 잘 수가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하루가 비몽사몽간에 흘러갔다. ‘이번 시험마저 떨어지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우울한 날들의 매 시간에 마루가 옆에 있어 주었다. 마루는 내가 백수이든 직장인이든 애정을 구분하지 않고 달려들었고 그저 내가 그의 누나인 것만으로 늘 같은 태도로 곁을 지켰다. 걱정, 안타까움과 위로의 말들로 위안이 되지 못했던 많은 날들 속에서 침묵으로 옆에 있어주는 것만이 힘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마루와 같은 공간에 누워있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 비릿하고 따뜻하고 고소한 그의 냄새는 한동안 잠의 묘약이 되었다.
아침마다 정신없는 뽀뽀를 퍼붓고 기어코 이불속으로 코를 밀고 들어오고야 마는 집념의 마루. 실수로 발을 밟아도, 공을 던지다가 얼굴에 맞아도 몇 분 뒷면 다시 살을 붙일 공간을 주는 작고 너그러운 천사. 마루를 보고 있으면 신이 모두를 돌보기가 버거워서 이 작은 천사들을 사람에게 보내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6살이 다 되어가는 청년 마루가 부디 나의 오랜 위로가 되며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나는 ‘강아지가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너가 늦게 온 주인을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안타깝게도 개들의 시간은 인간의 것과 달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가 있다. 무리하게 산책한 날 다리를 절뚝일 때, 알레르기가 심해져 피가 나도록 몸을 긁거나 슬개골 탈구 초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생명은 모두 다 끝이 있는 법이지만 그 끝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은 문득 아프거나 늙은 개들을 만날 때마다 상기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서 죽음이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두려움과 슬픔이 문득 스민다. 그럴 때마다 괜히 마루의 작고 동그란 뒷머리에 짧게 입을 맞추고 등을 쓸어 털을 헤친 뒤 코를 박고 길게 냄새를 맡는다.
나에게는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했음을 깨닫고 후회했던 많은 날들이 있었다. 어리석게도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었던 날들이 유한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마루를 만나고 나서 사랑하고 있는 순간에 사랑함을 알게 되었다. 마루의 존재가 나에게 말한다. ‘사랑할 때 사랑함을 알라고,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으니 지나간 사랑에 후회를 남기지 말라고.’ 그럴 것이다. 특히 너에게는 더욱더.
강아지는 천사니까 죽어서도 마루를 만나려면 천국으로 가야겠지. 그래서 때때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루를 다시 만나야 하니까. ‘너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너처럼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고 너처럼 쉽게 용서해 주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지.’
그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말의 온도와 눈빛, 손길로 그 뜻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마루의 목덜미에 입을 대고 ‘사랑한다.’ 말을 한다. 언젠가 마루가 천국에 가더라도 내가 했던 말들을 기억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