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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방 고라니 Jun 23. 2021

퇴근하고 덕수궁에 갔다.

야간 덕수궁 거닐기

오랜만에 주말에 책을 읽었다. 나는 새 책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 예전에 본 책을 가볍게 뒤적거리기도 한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도 주말에 뒤적였다. 이도우 작가가 쓴 이 책은 로맨스 장르 소설이라고 하기엔 담백하고 일반 문학이라고 하기엔 사랑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애매하고도 평범한 내용의 소설이다. 그럼에도 스테디셀러인 이유는 일상적이면서도 섬세한 말들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가는 작가 특유의 필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읽히면서도 자연스러운 문장은 읽는 이의 감정을 어느새 책 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도 그랬고 다른 독자도 그렇게 읽지 않았을까 싶다.




문학기행이라고도 한다. 작품을 한층 더 느끼기 위해 배경이 되는 곳을 찾는 일 말이다. 나도 좋아하는 작품의 실제 배경 장소에 가보기도 한다. 대만 여행을 갔을 때도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지를 찾아갔다. 좀 더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일종의 덕질이자 취미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인상 깊게 읽은 장면 중 주인공 커플인 '진솔'과 '건'이 개관시간이 지난 창경궁에 남아있는 장면이 있었다. 건은 진솔의 다이어리에서 밤에 고궁을 들어가 보고 싶다는 글을 보았고 둘은 그렇게 야간 창경궁에 남게 되었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 괜히 가본 적도 없는 야간 창경궁을 거닐고 싶어졌다. 그래서 퇴근 후 궁을 가보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꼭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변화를 주고 싶었다. 코로나 때문에 퇴근하고 집에 가는 것이 당연해졌고, 식사 외 다른 일정을 잡지 않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기에 일상의 루틴을 지키는 것이 덜 피곤하고 효율적이긴 하다. 그래도 조금 더 풍성한 삶을 위해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사서함 110호는 일상에서 시도할만한 구체적인 것을 제시했고 나는 해보기로 했다. 막상 결심하니 새로운 두근거림이 있었다. 그 마음으로 평일 야간 개장하는 궁을 찾아보았다. 



서울에는 생각보다 궁이 많았다. 내가 살던 지방에는 도심에 궁이 이토록 많지 않았다. 차를 타고 일정 이상 거리를 벗어나야 거닐 수 있는 곳이 궁이었다. 새삼 서울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깊은 역사를 느낄 겸 제일 먼저 알아본 곳은 경복궁이었다. 경복궁은 일자 별로 수량을 정해 야간 개장 티켓을 판매했고, 티켓은 이미 매진이었다. 다른 야간 개장하는 궁을 알아보다 덕수궁을 발견했다. 현장 발권에다 입장료도 저렴했고, 야간개장 시간은 21:00까지였다. 안성맞춤이었다. 




 퇴근 후 늘 탔던 7호선이 아니라 2호선에 몸을 실었다. 평소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시청역에 내려 대한문 앞에서 함께 가기로 한 이를 기다리는 저녁이었다. 공기는 선선했고 하늘은 주황빛과 검푸른 빛이 뒤섞여 어슴푸레했다. 그저 걸으니 담담하게 좋았다. 주위를 보니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도 이런 시간을 바라고 덕수궁을 찾았을 것이다. 짜릿하거나 성취감이 느껴지는 순간은 아니지만 노을을 보며 느리게 걷는 시간은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처마 뒤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본다던가 중화전에서 풍기는 절 특유의 나무향을 맡는다던가 했다. 


처마 뒤로 보이는 하늘이 시시각각 다른 색을 띤다.



낮 동안 보낸 시간과 대비되어 덕수궁을 걷는 시간을 더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업무 시간이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풀벌레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 하나 빠진다고 큰일 나지 않는 회사에서도 적당히 열심을 냈고, 나를 위해서도 야간 덕수궁을 찾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짙어졌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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