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의 추억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by 꿈꾸는 리얼리스트

14일은 우리의 기념일이다. 무슨 day라고 하는 게 14일이지 않은가?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까지 안다. 11월 11일은 빼빼로데이, 3월 3일은 삼겹살데이라는 것까지... 아니 로즈데이가 5월 14일. 우리의 기념일은 12월 14일이다. 그리고, 그의 생일은 4월 17일, 나의 생일은 3월 17일이다. 기념일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를 만난 2003년 12월 14일에서 벌써 16년째다. 그는 유일하게 내가 결혼 상대자로까지 생각해본 남자다. 사실 결혼 상대자로 아주 부적합한 남자였으나, 그때 나에게는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으로 부모님에게서 받는 사랑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고, 나 역시 그를 부모처럼이나 맹신하며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이따금 내 생일에 전화를 걸어오던 그였다. 자신의 생일과 날짜가 같기 때문에 잊히지는 않을 거다. "왜 전화했어?"라고 하면, "밥이라도 먹자고." 하던 그. 그리고 작년 여름에 한 번 보고는 정말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돌이켜보니, 의정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사무실 동료들과 생파를 하고 돌아왔다가 그가 만나자고 해서 야밤에 대학로까지 몇만 원을 들여가며 만나러 간 적도 있고, 지갑을 놓고 나갔다가 그가 만나자고 해서 홍대까지 갔다가 그가 택시비를 내어준 적도 있다. 그냥 무한신뢰가 되더라. 사랑에 속는 것이 인간의 속성, 혹은 바보 같은 여자의 비극인지도 모르는데 바보를 자청했던 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거의 3년을 매일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롭다. 그렇게 사랑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니 이젠 그만을 생각했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지금처럼 고향집에 와있거나 어디 지방을 가도 그 사람 생각만 했는데 정말이지 이제는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성당에서 나란히 앉아 연주회를 듣고, 청와대 부근을 걷고, 홍대 앞에서 매일 만나 맥주를 마시던 우리...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었을까? 지금은 마치 재연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처럼 목적도 없이 그냥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시선을 응시했었던 것 같다.


그와 헤어지고 한동안 많이 울었다. 그냥 생각만 해도 눈물이 주르륵... 가슴은 에리고... 심장 께에 통증을 동반하는 아픔...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덤덤하기는 처음이다. 새벽까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그와 명동에서 인사동을 돌고, 찜질방에 갔었던 2003년 12월 25일이 문득 떠오른다. 목욕탕에서 나와 커피 우유를 사주며 우유갑까지 따주던 너!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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