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유라 Mar 10. 2021

고사리가 맛있어지는 마법

보기보다 맛있어지는 일에 대하여


고사리는 꺾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고사리는 먹는 재미보다 꺾는 재미다,라고 하면 할 말 많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고사리 나눔한다 하면 열일을 제쳐두고라도 달려올 이들이 주변에도 많이 있지만, 정작 나에게 고사리는 먹는 맛보다 꺾는 맛이다. 시금치가 잘 생긴 느낌이라면 고사리는 잘 생겼다는 말을 선뜻하기가 어렵고, 고기의 식감과 색감까지는 닮았으나 짝퉁의 느낌 또한 피할 길이 없으며, ‘좋고, 아니 좋고’가 분명한 고유의 향을 탑재한 탓에 ‘아니 좋고’의 취향으로 기우는 나에겐 영~ 먹는 맛보다는 꺾는 맛이 더 크다. 꺾는 맛보다 더 맛있는 맛을 맛보지 못하였다. 얼마 전까지는.


롱파일 러그를 바라보며 고사리 허상을 본 경험이 있으신가. 길을 걷다 돌담 옆으로 비죽비죽 돋아난 수풀 사이로 고고하게 돋아난 고사리 허상을 본 경험이 있으신가. 초보 빌리어디스트가 사각 프레임만 보면 각도 계산을 해대듯, 고사리 꺾기 초보에게 수풀 모양이란 딱 그러하다. 곧게 뻗은 고사리 줄기를 엄지로 받치고 검지와 중지를 맞대어 밖으로 90도만큼 회전하며 ‘톡’하고 꺾는 그 맛을 다시 맛보고 싶은 충동! 예전만큼 고사리를 흔하게 꺾을 수 있는 산과 들이 드물긴 하지만, 고사리를 한 번 꺾어본 사람들은 이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 고사리 꺾기는 일종의 놀이 이상인 셈이다.


봄은 왔건만, 반짝하고 하늘이 맑았다 흐리기를 반복하는 서귀포는 고사리가 한창 준비 중이다. 열흘 사이에 봄비 맛도 보고, 흐린 하늘의 습기 맛도 좀 보다 보면, 산과 들에 고사리보다 꺾는 이들이 먼저 보인다. 이제 슬슬 흙 위를 파고 나와 고고하게 수풀들 사이에 비죽비죽 서겠지.



3월의 말, 비가 자주 내리고 흐린 하늘이 연일 이어지면 고사리 장마가 시작된다. 매년 반복되는 고사리 장마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며, 올해도 순화 씨는 마대자루를 짊어진다. 오전 6시면 어수룩한 빛이 고사리를 비출 터이니, 새벽 5시에 출발하면 딱 알맞다. 달이 휘영청 밝은 새벽 5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순화 씨의 차에 몸을 싣고 15분 남짓 대로를 달린다. 마른풀들이 무성한 흙 길로 접어들어 울퉁불퉁 5분을 더 달리면 초록 풀이 무성한 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어수룩한 목초지를 지나 언덕배기 산길을 조금만 더 오르면, 바로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한라산의 아랫목쯤. 소나 말이 뜯음직한 풀밭 위로 화성에 첫 발을 딛듯 나의 발을 내딛는다. 잔디처럼 생긴 잡초들이 땅 위를 촘촘히 메운 들길을 걷고 걸으며 고사리를 찾는다. 윌리를 찾듯 고사리를 찾는다. 순화 씨 등엔 납작한 마대자루를, 나의 등엔 백팩 하나와 보조가방을 가로세로로 메고 고사리를 찾아 눈을 굴린다. 땅만 보며 걷고 꺾으면서 찾고, 찾으면서 걷는다. 고사리 찾기를 서너 시간을 하고 나면, 집 앞의 화단만 바라봐도 고사리가 떠오른다. 톡 톡 톡, 자꾸만 꺾고 싶다.





공공재로서의 고사리


루쉰의 <고사리를 캐는 사람>에는 백이와 숙제 형제가 나온다. 먹을 것이 없어 고심하던 동생 숙제가 보모의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시골 사람들은 흉년에 고사리를 먹곤 했다는 걸 기억해 낸다. 그리고는 형 백이와 함께 고사리를 캐서 먹고살다가, 그 고사리 또한 주나라 왕의 것이 아니겠는가 반문하는 여인의 농을 곧이듣고, 그마저도 먹지 않아 굶어 죽게 된다. 요즘으로 치면 좀 바보스럽기 까지도 한 두 성인의 이야기는 옛날에도 고사리는 고사리가 나는 땅의 주인의 것이라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제주에서 고사리는 일종의 공공재다. 예로부터 척박했던 제주에선 먹을 것이 귀해 산과 들에 나는 모든 먹거리는 이 땅에 사는 제주인을 위한 것이었고, 제주인을 살리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놀이 삼아 오르던 산 위에서 고사리 한 줌 한 줌을 모아 근을 달아 팔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는 걸 보면, 고사리가 자라난 땅이 어딘지 상관없이 공공의 자산으로 여기며 두루 베풀던 기억은 결코 오래지 않았다. 하여 지금까지도 고사리철이 되면, 사유지일지라도 제주 사람들을 위해 닫았던 문을 열어두는 곳들이 적지 않다. (물론 꽁꽁 닫아두는 곳들 또한 적지 않다.) 유교사상의 뿌리가 깊은 이곳에 삼색 채소 중 하나인 고사리를 귀히 여기는 제주인의 마음을 존중해서이지 않을까.



아이도 공공재


공공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낸시 폴브레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아이 또한 공공재라 했다. 아이가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들의 계발된 능력과 자질로부터 우리 모두가 이득을 본다는 말이다. 고사리가 일단 세상에 얼굴을 비춘 이상 고사리가 내어 줄 식감과 영양과 맛으로부터 우리가 이득을 본다는 얘기와 같다. 얼핏 보기에 아이라면 모두가 공공재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들의 계발된 능력과 자질로부터’. 기브 앤 테이크를 전재로 하는 서양 문화에 토대를 둔 지극히 당연한 조건이다. 도움을 줄 수 있어야만 공공재로써의 가치가 성립된다는 말이다. 계발된 능력과 자질이 없다면? 공공재로써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장애아를 둔 엄마로서 공공재인 아이들을 우리 함께 키우자는 사회의 말에 선뜻 손을 잡기가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내가 줄 것이 없는데, 어찌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미래 가치란 현재의 누구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알지만, 긍정 부정의 어떤 판단도 쉽지가 않다. 당당하게 사회에 도움을 청하고 당연하게 장애 아이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부모님들도 많은 반면, 내가 내어 줄 것이 없고 미래에 아이로 하여금 계발될 능력과 자질이 모자랄 것만 같아 홀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부모님들이 더 많다. 우리는 자신이 없다. 아이를 사회에 내놓기가.






더 맛있게 먹어 보려는 노력


작년 그렇게 고생하며 꺾어온 고사리가 많이 남았는지, 고사리철을 목 전에 두고 묵은 고사리를 처분하기 위함인지, 순화 씨가 고사리를 산더미로 주셨다. TMI를 덧붙이자면, 순화 씨의 스케일은 이미 덕선이 엄마를 따라갈 수가 없다. 아무리 고사리는 꺾는 맛이라지만, 고생하며 꺾은 순화 씨의 노고를 생각하면, 대충 해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미래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보장 없이 무작정 학교로 떠난 찬이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공공재 고사리를, 맛있게 요리해보고 싶었다. 백이숙제도 고사리탕, 고사리찜, 고사리장, 익힌 고사리, 고사리싹탕, 풋고사리말림 등으로 다양하게 조리해 먹었다지 않은가. 2500년도 더 된 사람들의 고사리 조리보다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레시피를 검색했다. 고사리스파게티! 도오오오전! 이 요리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렇게 하겠다.


- 새벽 5시 달 기운 잔뜩 받고 꺾어낸 자연산 제주 고사리를 끓는 물에 팔팔 삶고 볕 좋은 마당에서 잘 말린 다음, 다시 물에 불렸다가 올리브유에 마늘 넣고 볶은 후, 삶은 스파게티면과 면수를 넣어 소금으로 간을 한 고사리올리브유스파게티!






‘아니 좋은’ 향으로 기억됐던 고사리 향이 올리브유와 마늘과 만나 좋은 냄새가 났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뛰쳐나온 찬이와 함께 나의 코끝도 은근히 쏠렸다. 맛있어 보이라고 신경 써 내온 스파게티 위에 김가루와 파슬리를 솔솔 뿌리니 그럴싸한 음식이 되었다. 고사리는 안 먹는다던 찬이가 마늘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다 먹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따라먹었다. ‘역시’는 역시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는 이유가 있고, 따라 할 만한 이유 또한 크다. 이렇게 맛있고, 이렇게 흐뭇해져 버리는 요리라면 다시라도 해 먹겠다. 


어떤 재료든 어떻게 해서라도 잘 먹어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사리 맛을 모르던 내가 고사리스파게티 생각이 나버린 것처럼, 어떻게 해 먹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과 향이 달라지니 말이다. 색다른 조합을 고민하고 보다 어울리는 맛으로 재탄생시키려는 노력은 인류에게 마땅한 일이 아닐까.



어떻게든 잘 쓰일 것이라는 믿음


같은 의미로, 공공재 반열에 오르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장애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 수행을 할 수 있을지 재탄생시키려는 노력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사회가 멈추지 않는다면, 무쓸모의 존재는 쓸모의 공공재로 거듭날 것이며, 쓰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보다 어떻게 해서든 쓰이려 한다면, 결국엔 쓰일 것이다.


안 넣어도 먹을 만 한데 ‘굳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굳이 넣어서라도 깨소금에 무친 고사리를 만들어 먹고, 굳이 넣어서라도 올리브유에 볶은 고사리파스타도 만들어보고, 굳이 넣어서라도 반죽을 빚어 동그랑땡도 만들어 먹어 보자. 그러다 보면 얼큰한 육개장 속 고사리로 의외의 주인공 맛을 볼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잘 쓰이려는 노력을, 잘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을, 부모님이 먼저 가져야 할 이유다.


쓰이는 존재가 되어 보자. 찬.





이전 25화 높이 오르면 보이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