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보았다
추울 거라는 예상을 깨고 맑았다. 애들 보내 놓고 돌아와 주섬주섬 빨래며 장난감이며 정리 좀 해두고 거실 창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 바다 수평선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가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쾌청했다. 우편 부칠 일이 있어 우체국까지 걸어 가기로 했다.
돈이 없어도 누릴 수 있는 건 시간이라 했으니까. 계절이라 했으니까. 자연이라 했으니까. 마스크 한쪽 귀를 내리고 공기맛이 이런 거였나 처음 맡는 사람처럼 걸었다. 나무들이 집들이 새들이 하늘이 오늘 날씨 좋아 좋아 좋아 그러는 것만 같다. 날씨 따라 내 마음도 변덕처럼 흔들리듯 무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의지 따위 필요할까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일기 쓰듯 그러고 있었다.
바닥이 울렁울렁, 창문이 덜렁덜렁, 사방에서 우르르르르르 천 개의 바위가 언덕을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공사하나? 무슨 공사를 땅이 무너질 정도로 하지?! 창밖을 좀 살펴보려는데 아파트가 꿀렁꿀렁 움직인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바닥이 붙은 바닥을 따라 온몸이 꿀렁꿀렁 움직인다. 만화인 줄;;;
출렁이는 배를 탄 기분인데, 멀미가 난다. 아파트가 문어처럼 변한 줄 알았다. 딱딱한 집이 연체동물로 변신을 한 줄 알았다. 땅 속에서 거대 괴물이 솟아오르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북한에서 드디어 일을 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든 게 현실이 아닌 듯 현실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체감상 30초는 족히 된 기분이다. 숨이 가빠왔다. 헉! 하는 순간 재난문자가 동시에 삐——
"엄마! 지진이래!"
아! 지진.. 죽을 수도 있겠구나..
얘들아 이리 와바바바. 뭔가 와장창 깨지기라도 하면 뛰쳐나갈까.. 생각하는 순간 지진이 멈췄다. 둘째를 찾았더니 식탁 아래에 있었다. 첫째를 찾았더니 내 옆에서 지진 발생 시 대피요령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서울에서 톡(5:22)이 왔다. 서울에서 전화(5:24)가 왔다. 블로그 댓글 알림(5:27)도 떴다. 와중에, 지진과 동시에 떴던 재난문자(5:19)는 정말 대단하다 생각했다. 관리실에서 여진이 있을 수 있으니 대비하라고 방송을 했다. 재난 실황이구나. 우와.... 어질어질. 아이들도 어지럽다고 어지럽다고 했다.
어머님 생각이 먼저 났다. 남편보다 어머님 생각이 왜 먼저 났는지 모르지만, 어머님 생각이 먼저 났다.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괜찮으시냐고 물으니 당신은 목욕하느라 모르셨단다. 단독이라 못 느끼는 건가.. 난 분명 바닥이 꺼지는 줄 알았는데... 생전 처음 느껴본 이 생소한 두려움을 혹여 위로받을까 기대했나 보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계신 듯, 어머님은 한 마디 하셨다.
"지진이 나도 별 수 있냐. 그냥 그러고 죽든지 살든지 하는 거지 뭐."
그러고선 끊으셨다;;; 하긴, 목욕하다 지진 느끼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낫지 싶다. 가끔 샤워를 할 때마다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곤 하는데 맞다, 별 수가 없다. 어머님 말씀처럼. 그렇다, 죽으면 죽는 대로 살면 사는 대로 그만이다 생각하니 두근대던 마음이 멈췄다.
재난문자보다 먼저 올 거라 믿었던 남편은 어쩌고 있는 거지? 전화가 없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건물이 무너질까 봐 정신없이 뛰쳐나오는 중이었단다. 나부터 살아야 누구를 구해도 구할 수 있지. 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동안 지진은 지나갔고, 아이들 걱정보다 내 자신의 안위가 먼저 떠올랐던 내 마음에 놀랐다. 70년 된 건물 2층에 있던 남편도 가족이고 뭐고 'ㅈ됐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아마 겨우 살아남을 정도의 지진이었다면 나부터 살고서 처자식을 찾았겠지.. 했다.
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게 이거구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드는 순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끝. 하고픈 말이고 뭐고 가족, 사랑, 소원..? 아무 생각이 없다. 죽기 전에 너를 사랑하였노라.. 눈물짓는 그런 상황 따윈.. 없었다.
그냥 끝.
지진 강도가 4.9였다는데 6을 넘어서면 죽겠구나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별 수가 없다. 어머님 말씀처럼, 별 수가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