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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Aug 21. 2021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자꾸 보여줘야 성장해요. 당신도, 나도


마라톤이 될 거라고 했다. 42.195킬로미터는 당연하고, 하프 마라톤은커녕 10킬로미터도 뛰어 본 적 없던 나는 황영조 선수로부터 마라톤에 대한 감각을 배웠다(응.. 이봉주 선수 말고 황영조 선수;;). 황영조 선수가 달리면 눈과 마음으로 함께 달렸다. 눈으로 시간을 달리며 배웠다. 눈으로 배운 마라톤에 대한 감각은 모동숲에서 바다수영을 하다 건져 올린 대왕거거의 희열만큼이나 게임스러웠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올림픽 영웅의 기록이란 것이 2시간 남짓에 불과한 것이라서 마라톤 소요 시간은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마라톤'이라는 비유를 쓰는 이유는 두 시간 남짓 내리 달려야 하는 시간적 의미보다는 지루하고 힘든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의미 비중이 클 것이다. 오래도록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머리로 먼저 이해했다, 오케이. 오래도록 나눠 쓸 힘을 장착해야 한다는 의미를 마음으로 후에 새겼다, 오케이.

아들의 장애는 '마라톤'이라는 말과 함께 다가왔다.


게임하듯 살았다. 오래 걸릴 거라는 말조차 게임 속의 시간 다루듯 했다. 오래 걸릴 거라는 말에도, 그래 봤자 결국엔 웃게 될 거라는 모동숲스런 믿음이 있었다. 오래도록 헤엄치다 보면 언젠가는 꽃게를 내놓고야 말 거라는 믿음과 같았다. 게임이 계속되려면 대왕거거도 건져 올리게 해 주고, 꽃게도 한 번쯤 맛보게 해줘야 하는 거니까. 내 삶에도 결국엔 웃고 말 무언가를 간헐적으로라도 던져 줄 거라는 해맑은 믿음이었다. 내 아이의 장애는 내가 클리어할 수밖에 없는 난이도 최상의 미션일 뿐이었으니까.



인생을 게임하듯 살면 한결 살아가기가 쉽게 느껴진다. 레벨 업하는 재미에 빠져 사는 거다. 지금 레벨에 맞는 미션을 계획하고, 미션 클리어를 외치며 일과를 빼곡하게 채우는 재미는 게임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한다. 사는 게 쉽게 느껴지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다. 아무리 어려운 미션도 깨는 재미는 더 클 것이라는 보장이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포기가 쉽지 않다.



매뉴얼을 살피기도 한다. 이 길을 먼저 살아간 선배 엄마들에게 정보를 얻거나, 찬이보다 나이 많은 형아들을 찾아보는 식이다. 찬이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형아들을 찾아보면서 꿈을 가져보기도 하고, 이 정도는 찬이도 해볼 만하다 싶은 것들은 열심히 따라서 해본다. 주변에서 찾기가 힘들어지면 온라인에서 찾는다. 찾기만 하면 보이는 형아들은 다음 레벨 업을 향한 충실한 매뉴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롤모델 같던 형아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형아들의 졸업과 함께 달라진 생활패턴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막연하게 잘 살고 있겠거니 믿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형아들은 활동 보조사 선생님들과 함께 나타나곤 했다. 후엔, 형아들의 엄마들은 이 게임에서 이미 퇴장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유가 궁금했다. 조금만 더 하면 이보다 더 좋아진 기능으로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포기해버린 것만 같은 모습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 다른 이에게 아들의 손을 넘기는지 달려가서 묻고 싶었고, 나의 미래에 묻고 싶었다. 결국엔 나도 같은 길을 밟게 될는지를. 형아들이 선생님과 함께 오고 가는 모습은 흡사 NPC로 변해버린 패배한 게이머 같았다. '엄마들의 삶도 중요하지요' '초등학교 이후에는 따라잡기가 힘드네요' '머리 좀 컸다고 엄마 말은 안 들어요' '엄마가 없으니 더 잘하더라고요' '결국 믿을 건 돈밖에 없더라고요'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벌어야죠' 다양하게 떠오르는 이유들 속에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납득할만한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삶을 산수하듯 계획했으니, 결국엔 도착하고야 말 최고 레벨까지 얼마나 걸릴지 계산이 가능했다. 찬이가 1년에 0.5년 치만큼의 발달을 이루고 있으니 12살인 지금은 5~6세 정도 수준이 맞고, 20세엔 10세 수준, 30세엔 15세 수준은 되겠구나, 라는 아주 단순한 산수적 삶을 계획했다. 15세 정도의 수준이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독립 능력이 충분하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이제 열한 살이니 19년만 더 하면 찬이의 독립은 기정사실이 되는 거였다. 19년만 더 하자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야심 찼던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찬이가 열두 살 되는 해부 터였던 것 같다. 찬이가 4학년이 될 때까지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기능적인 훈련을 더 해주는 것이 산수상으로 남는 장사인데 왜 학교엘 보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던 내가 부지런히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학교에 보낸 이상 내 인생에서 찬이 문제는 잠시 꺼두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학교의 일을 겪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찬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찬이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은데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찬이의 몫이라면 이왕이면 실수가 용납이 되는 어린 나이일 때,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이는 찬이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사는 비중을 키워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내가 낳았으니까 죽을 때까지 내 책임이라는 게 당연했다. 그 책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아이의 일은 부모의 책임이 1차라는 데에 이의는 없다. 다만, 장애라는 문제가 생기면, 2차적 책임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장애라는 것이 랜덤 뽑기와 같은 우연적 사건에 기인한다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찬이가 짊어진 거라면? 찬이의 장애는 전적으로 나만의 책임일 수가 없다. 사회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장벽과 장애를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이 장애를 장애여야만 한다고 가두려고 할 때 개인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책임을 다해 장애를 극복하려 해도 사회가 장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사회 안에 찬이가 어울릴 자리는 결코 오지 않는다.



아이는 혼자 자라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허투루 이해했다. 아이들의 발달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엄마로부터 말을 트고, 친구로부터 친구의 말을 배우고, 어른들로부터 예의를 배우며 사회와 함께 했을 때 진정한 사회 일원으로 발달해 가는 존재라는 걸, 찬이 열두 살이 되어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부모 혼자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여 장애는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며, 사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장애를 만나게 해주는 건 내가 해야 할 몫이다. 집안에만 갇혀 살아서는 사회가 장애를 들여다볼 수가 없고 이해할 수조차 없다.



나와 찬이의 삶도 공유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누군가에게 닥칠 이 일을 우리가 겪었던 그대로 다시 겪게 한다는 건 먼저 겪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선배 부모님들께 물으면 당신의 몸을 갈아 키웠다는 말을 한다. 죽을 둥 살 둥 애 많이 썼다고, 그만큼 하니까 이만큼 키울 수 있었다고. 당신들의 노고가 이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한 바와 다름없음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누군가가 당신의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낸 건지는 당신만 아는 사실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회가 알지 못하는 그 일에 대한 보상을 어찌 알아줄 수 있겠는가. 삶은 당신에게 희생을 바라지 않았는데. 알아줄 마음도 없고, 그리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그리 살았을 뿐, 누구도 희생을 원한다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여, 보상은 스스로의 몫일뿐.



당신도 몸을 갈아 키웠으니 나 또한 그렇게 몸을 갈아 키우라는 말은 너무나 잔인하다. 네 삶은 이제 끝났어, 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위로를 해도 모자랄 판에 몸을 갈아 키우라는 말은 밉다. 내 몸을 더 이상 갈고 싶지가 않다. 이만큼만 갈아도 됐다 싶은 마당에 더 갈아 키울 자신도 없고 마음도 없다. 앞으로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갈 삶이 후에 겪을 누군가에게 또다시 그리 살아야 된다고 얘기하기 싫은 삶이 될까 봐 두렵다. '이렇게 힘들게 키우셔야 합니다'라는 말은 '힘내세요'라는 말보다 악랄할 셈이니까. 이제 막 아이들의 장애를 인지하기 시작한 부모님들께 장애를 이제는 받아들이셔야지요,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라며 몸을 갈아 키우라 말하는 무책임함은 갖고 싶지 않다. 아이의 장애는 부모가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게임 속 세상과 다른 점은 게임 속 세상은 성장을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스스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아이가 올바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사회가 올바로 성장할 수 있으려면 장애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의 일정 부분은 우리에게 있다. 잘 살아갈 방법이 있다면 공유하고 나누며 머리를 맞대 해결방안을 키워가야 한다.



장애를 겪는 부모들은 자신의 문제를 쉽게 공유하기가 힘들다. 아이들의 문제이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커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진다. 아이들의 문제가 여전히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고통이 됨에도 공유는 더 힘들기만 하다. 장애가 때로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인도주의적인 방법은 친해지는 것이라는 말처럼, 알면 쉬워진다. 사회가 모르면 모를수록 공포의 감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소리를 지르며 몸을 흔드는 잘 생긴 민수형아도 정색을 하고 제대로 보면 감수성 예민한 훈남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점점 모르는 채 성장한다. 왜 사회가 알아야 하고, 자신의 문제를 공유하고 나누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하는지 자꾸자꾸 생각하려고 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에게 자꾸자꾸 이야기하라고 독촉코자 글을 쓴다.



내 아이는 내가 짊어져야지, 라며 꽁꽁 싸매고 동동 발을 굴리는 언니를 보며, 세상으로 나와 마구마구 하소연해도 된다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쓰기 시작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갈수록 다시 돌아 나올 문은 열기가 어려워질 뿐이라고. 자꾸자꾸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싶어 쓴다. 장애는 창피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모두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할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제대로 끌어안아서 몸을 갈아 키웠다는 말 대신, 키울만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사건일 뿐이다.



장애를 넘어서는 진정한 힘은 '극복'에 있지 않다. 사회가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해안을 마련하며, 공동의 숙제 풀이가 될 때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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