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뿔고래들에게
"그럴 거면 드라마라도 좀 봐~"
그렇게 좋아하던 책도 보지 못하고 멍 때리고 있던 내게 기어코 어머니는 한소리를 했다. 드라마라도 볼까? TV를 샀다. 스마트하고 얇은 TV였다. PC와도 연결이 되고 케이블 망과도 연결이 되어 여러모로 세상과 다시 접속하게 됐다.
6개월.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기간이다. 우울증 약을 받아먹으니 몸이 스펀지에 젖은 빵 마냥 가라앉았다. 사람을 만날 정신도 아니고 만나서 할 얘기도 없었다. 이미 내 친구들은 고장 난 녹음기 같이 반복되는 내 말에 충분히 지쳐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 준 내 주변 친구들은 오히려 내 병을 안타까워했지만 나 스스로가 그들 앞에 나설 자신은 없었다.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 가면 헛구역질이 났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내 휴대폰 번호를 물어오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 번호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내 모든 것을 잊어 가고 있었다. 얼굴을 바꾸고 다른 나라에 가서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번 생은 어차피 망했으니 빨리 끝내고 다음 라운드로 넘어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저녁은 길고 아침은 더 길었다. 반복되는 하루가 그냥 길고 길어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써 놓고 보니 읽는 사람들이 지칠만한 글을 썼다.
그리고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11월 11일. 최근까지 난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회피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머니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육체의 죽음을 내 기억의 죽음으로까지 인정할 필요는 없다. 기억만이라도 어머니를 살려두고 싶었다. 지금 당장 차를 타고 내려가면 그 집에 그 모습 그대로 어머니가 나를 반겨 주리란 헛된 믿음을 믿었다.
그렇게 떠나간 엄마는 나에게 드라마를 남겼다.
"드라마라도 좀 봐~"
그래 그렇게 TV를 샀다. 어머니를 여의고 그다음 해 7kg 배낭 하나 매고 유럽으로 갔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 낯선 땅에 발을 딛고서야 제정신이 났다.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리듬에 침잠되었던 나의 신체와 정신은 낯선 공기를 들이마시고야 깨어났다.
유럽의 낮은 무수히 많은 시청각적 자극으로 분주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덕분에 슬픔을 잠시 유보할 수 있었다. 다만 밤이 문제였다. 유럽의 밤은 길고 유난히 고독했다. 긴 밤을 버티려면 드라마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난 바르셀로나에서 아테네에서 파묵칼레에서 '미생'을 시청했다.
나 스스로가 미생이었기에 드라마는 내 얘기 같았다. 완생의 삶을 꿈꾸는 미생들의 삶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천만 원도 훨씬 넘는 돈을 유럽에 뿌리며 나는 한 달도 넘게 유럽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마치 다시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는 단테처럼 서울로 다시는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돌아가면 나는 산산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비야였을 거다. 흥이 넘친 사람들이 나에게 환대의 인사를 건넨 곳은. 두브로브니크였을 거다. 아픔을 간직한 그 땅에서 일생을 살아온 마르코 아저씨가 화이트 와인을 건넨 곳은.
난 어쩌면 인생은 긴 여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하고 있는 자에게는 길고 마쳐가는 자에게는 짧은 그런 각자의 길이로 살아가는 외톨이 여행.
우리는 모두 외뿔고래인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항로를 향해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가야 할 길이 있고 그곳을 향해 나름의 속도로 나아가는 그런 외뿔 고래 말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영우는 회전문 앞에서 망설임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신만의 왈츠를 추며 문을 통과한다.
"오늘 아침 제가 느낀 이 감정의 이름은 뿌듯함입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시 구절처럼 다시 힘을 내어 살아보려고 한다. 이런 마음을 품은 내가 이 아침 느끼는 감정의 이름은 '설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