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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락 Oct 23. 2022

사랑의 연대기

#20세기 소녀

20세기에 시작된 사랑은 21세기까지 이어진다. 사랑의 연대기인 셈이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고, 서서히 스며드는 감정도 있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불쑥 다가온 감정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청춘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미래의 청춘들도 분명 가슴앓이를 이어갈 것이다. 


가끔 왜 사냐는 질문이 마음에서 올라올 때가 있다. 그 전에는 살아 있으니 그냥 사는 거라 답하곤 했다.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질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랑. 사랑하기 위해서 산다. 끝내 이 답을 받아 내고야 마음은 잔잔해졌다. 알다가도 모를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 날이었다. 


그럼 사랑은 뭐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이들은 더 많이 나를 소유하려 했다. 내 시간을, 내 감정을, 내 자유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쥐고 흔들었다. 사랑은 소유권 주장인가 싶었다. 


그런 사랑은 사양하고 손절하겠다. 이유 있는 반항으로 마음을 닫았다. 넌지시 너를 위한 거야라는 식으로 다가오는 선의를 거절했다. 


내 입맛에 맞는다고 꼭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그러니 다리 꼬지 마라. 넌 편할지 몰라도 난 불편하다. 


자전거를 타고 아무렇지도 않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얼마 뒤 같은 자리를 걸어서 건너며 내 옆을 휑하니 지나가는 자전거와 마주친 후 난 자전거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 자리에 서기 전에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이 아무리 선의라 해도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리란 보장도 없다. 


그런 저런 이유로 사랑은 상상의 나라에서는 자유이지만 현실에서는 기술 Art이 필요하다. 경험에서 배우고 자라나는 그런 예술이 사랑을 사랑답게 한다. 


영화 '20세기 소녀'에서, 운호를 현진으로 착각한 것도 연두를 대신해서 보라가 연두가 첫눈에 반한 운호의 일거수일투족을 메일로 써서 보고한 것도 모두 보라의 선택이었다.


너를 위한 것이었다는 보라의 울부짖음에 연두는 난 너의 친구지 니가 돌봐야 할 환자가 아니라며 뒤돌아 선다. 거기까지 난 연두가 진실한 보라의 친구라고 믿었다. 


보라는 연두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자신이 바람을 외면했다. 이제 사랑은 갈 길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감정을 돌보지 않을 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마저 끊어 버린다. 


영화는 조금 더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출입구에서 멈춰 버린 어정쩡한 태도로 성급히 보라와 연두의 우정을 회복시키고 운호와 보라의 사랑을 급하게 이어놓았다. 


이 점이 아쉽다. 그렇게 급하게 끝내야 하는 건 영화는 길어야 두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삶은 그야말로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이어진다. 


밤새 울고 헤어졌다 만났다가를 반복하는 그 지루한 관계를 이어가는 동안 사랑의 연대기는 반복된 기록을 남긴다. 


영화 20세기 소녀


사랑에서 뭘 배운 건 없다. 애초에 학습을 위해 만난 건 아니니까. 다만 난 그 사랑 때문에 성장했다. 누군가의 사랑 덕분에 까탈스럽고 좀 안 맞는 사람도 어느 정도 견뎌낼 만큼 난 그렇게 어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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