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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Dec 12.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47

운명적인 운명 01

테이너를 생각하면 자꾸 웃음부터 난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유쾌하게 남아있는 것도 축복이다. 테이너는 '만능 엔터테이너'의 줄임말이다. 테이너는 밴드 악기에 대해서는 거의 만능이기 때문이다. 기타면 기타, 베이스면 베이스, 드럼이면 드럼, 키보드면 키보드, 다 갖추었다. 그런데 메인은 보컬이라는 사실. 말하자면 사실상 1인 밴드로도 부족함이 없다. 이것저것 다 연주해서 녹음한 뒤 틀어놓고 그 위에 보컬만 얹으면 밴드곡이 완성되어 버린다.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굳이 흠을 잡자면 으흠, 몸매?




테이너를 처음 만난 건 개나리가 활짝 피던 봄날, 점심시간이었다.

급식실에서 내려와 본관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에 자리 잡은 작은 밴드실. 급식 지도를 하고 내려오는데 애절한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런 멜로디도 코드 반주도 없이 그냥 드럼 소리에 섞인 샤우팅. 이렇게 불러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신해철이 만들어 불렀는데 하현우가 더욱 잘 살렸던 노래 'Lazenca, Save Us'. 비록 매우 잘 가다듬어진 보컬은 아니었고, 드럼의 사운드도 참 형편없었지만, 얼핏 듣기에도 꽤나 느낌 있는 해석이었다. 누가 감히 나의 최애곡을 이렇게 당당히 불러젖히고 있는가? 빼꼼히 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테이너가 혼자 드럼 앞에 앉아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비록 드럼만 두드리고 있었지만 이 노래를 매우 잘 아는 나는 그 사이사이 비어있는 멜로디와 사운드들이 환청처럼 들리며 싸구려 엠프에서 나오는 찌직거리는 소리마저도 정제된 녹음실의 그것처럼 매우 경건하게 들렸다. 사랑하는 노래에 대해서는 예민한 편이라 누군가 그 노래를 구겨버리는 것에 심히 분노하고도 남는 스타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부르는 이 곡이 이렇게까지 위대하게 들릴 수가 있는 걸까?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입이 떡 벌어진 채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릇 밴드란 사운드가 절반이라면 비주얼이 또한 절반이렷다.

그렇게 따져볼 때, 그날의 비주얼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다름 아닌 우리반 곰탱이. 덩치가 산 만한 남자애가 내 허벅지 만한 팔뚝을 날렵하게 움직이며 드럼을 두드리는데, 왜 이렇게 드럼이 작아 보이는 건지. 주니어용 드럼에 앉아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커다란 몸집에 이렇게 간드리진 고음이라니, 높은 음역대에서 가늘게 쭉 뻗은 소리가 둔탁한 등짝과 상반되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자꾸 외모로 어쩌고 하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연주력만큼이나 음악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게 비주얼이기에 아흐, 이걸 그냥 외면하긴 어렵다. 난 밴드엔 진심인 편이라 전반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를 멈출 수가 없었다.




노래가 끝났다.

난 애청곡의 전혀 색다른 버전을 만난 것에 대해 반가움을 표현하기 위해 홀로 박수를 쳐줬다. 테이너는 기대했다는 듯 빙그레 웃더니 이번에는 건반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이렇게 합주실 용도로 만든 건지, 아니면 창고였는데 계란판만 붙여 개조한 건지 모르겠으나, 천장 가까이에 붙은 작은 환기용 창문을 제외하곤 빛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공간, 간신히 드럼과 키보드를 'ㄱ'자 모양으로 붙여놓고 나머지 공간은 의자 몇 개로 구색을 갖춘 좁은 밴드실에 테이너는 북극곰처럼 꽉 찬 몸뚱이를 키보드 앞에 갖다 두고 연주를 시작했다. 역시나 물고기를 잡으려고 개울물에 쪼그리고 있는 곰탱이 같은 비주얼, 특히 감성에 젖어 잔뜩 우그러뜨린 어깨가 더욱 몸을 둥글둥글한 곰돌이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귀여움도 잠시, 차분하게 건반을 누르며 시작된 노래, 역시나 고음 작렬인 '마법의 성'이라니. 이번에도 역시 살짝 음정이 아래로 떨어지는 감이 종종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고음, 특히 나는 같은 노래라도 싱어가 재치 있게 마지막 반복에 조옮김을 하여 반음을 살포시 올려서 부르면 너무 좋아서 반쯤 기절한 채 듣곤 하는데, 이 녀석이 센스 넘치게 반음을 올려 부르는 바람에, 또다시 비주얼의 압박을 잊고 음악에 홀려버렸다.




테이너는 성격도 좋았다.

지난봄, 드디어 2학년이 되어 후관 앞뜰을 차지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은 작년 2학년들이 했던 것처럼 말뚝박기에 열을 올렸다. 이게 무슨 전통이라고, 저렇게 다 큰 녀석들이 자기 몸뚱이 크기는 생각도 안 하고 남의 허리에 속도까지 실어 붕붕 날아가 몸을 던지니 이건 정말 안전을 위해 철저히 단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마다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앞뜰을 지켰다. 그러자 종목은 족구로 옮겨졌다. 역시나 그것도 단속의 대상. 그대로 유리창을 깨뜨릴 수 있다. 이번엔 배드민턴으로 바뀌었다. 그건 아무래도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번엔 제기를 가져왔다. 인근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전통놀이 교육 준비물로 대량 들여놓은 걸 재미 삼아 가져왔는데 인기가 날로 치솟았다. 제기는 아무래도 작고 싸고 아무데서나 꺼내어 놀 수 있기 때문에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중생들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자, 이 모든 걸 주도한 자가 바로 테이너이다.




점심시간의 풍경이 이럴진대, 쉬는 시간은 또 어떠한가?

10분간의 짧은 시간을 그냥 10분으로 활용하지 않고 15분으로 늘리는 재주 또한 그 아이의 몫이었다. 테이너는 수업을 5분이라도 일찍 끝낸 경우 꼭 손을 들어 곰돌이가 엉덩이 춤이라도 추듯 살랑거리며 선생님께 애교를 발사하고 남은 5분은 조용히 공기놀이를 해도 되겠느냐고 공손히 여쭈었다. 대부분의 선생님은 테이너가 더 둠칫거리기도 전에 웃음부터 빵 터져 눈을 흘기며 그러라고 허락해주신다. 그리하여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장장 15분에 걸쳐 팀 공기 배틀을 벌이는데, 참 별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지켜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된단 말씀. 주로 선수들은 여자애들이지만, 전혀 이질감 없이 여자애들과 어울려 '어머, 어머'를 반복하는 그들만의 리그는 건전하고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다. 공기놀이가 한물가고 바야흐로 수세미 코바늘 뜨기가 유행이었다. 아이들은 설거지할 것도 아니건만 실뭉치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까슬한 수세미 실로 동그랗게 수세미를 떴다. 테이너는 할머니가 좋아하실 거라며 특유의 그 몸을 둥글둥글하게 웅숭그리고 앉아 친구의 연애담을 늘어놓으며 코바늘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급기야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신생아들의 모자를 떴는데, 이 또한 아이들에게서 신청받아서 박스로 물품을 받고 완성된 모자들을 모아 기관에 보내는 일을 도맡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테이너는 그냥 이렇게 나서는 걸 좋아했고 바깥 놀이뿐만 아니라 실내 놀이에서도 빠지지 않고 놀이 문화를 주도하여 모든 아이들을 즐겁게 했다.




테이너가 주도한 가장 인상적인 놀이는 '코노'가기이다.

테이너는 둥글게 쪼그리고 앉은 친구들의 중앙에서 생수병을 돌려 병뚜껑이 가리키는 친구의 노래를 들으며 화음을 넣어주거나 약간 부족한 부분들을 짚어내어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주는 신기한 놀이를 계발했다. 누가 이런 놀이를 하겠느냐 하겠지만, 아이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냥 잘들 노래를 불러댔다. 친구들끼리라고 생각하면 못할 것 같은데, 선생님과 연습생들이라고 생각하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보컬쌤을 자처한 테이너는 고음에서 매끄럽게 소리를 내기 위해 성대를 어떻게 단련시켜야 하는지, 호흡을 어떻게 해야 소리가 힘 있게 뻗어 나오는지 등등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시범을 보였다. 아무리 음치 박치에 대박 놀림감이 될 듯한 아이도 순서에 담첨되면 거침없이 노래를 불러 테이너의 지적을 받고 연습해와야 할 숙제를 지시받기를 즐겼다. 그리고 모두 코노(코인 노래방)로 몰려가 각자 자기 노래의 연습 분량을 채우곤 했다. 테이너는 심지어 작은 수첩에 아이들 이름을 쓰고 노래 제목을 덧붙여 쓴 다음, 연습이 끝난 아이들이 돌아와 다시 불렀을 때 어떻게 진보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체킹하고 지난 레슨에서 검토했던 것들을 이번 레슨에서 놓치지 않는 진지함을 보였다. 아이들이 노래를 사랑하는 건지 보컬쌤을 사랑하는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이런 역할극을 사랑하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인기 운운하는 테이너의 이야기는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전 절대 연애하지 않을 거예요, 쌤. 적어도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는, 취업하기 전까지는 연애도 안 할 거라고요."

"그래? 그런 얘길 왜 해? 누가 너더러 연애 하자든?"

"이놈의 인기는 진짜, 피곤해요, 쌤. 그래도 안 해요, 연애도 결혼도."

"야, 지금 네 나이가 결혼까지 언급할 나이는 아니지. 그리고 애들이 무슨 연애냐?"

"그쵸? 그게 다 사연이 있는 거죠."

사연이 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테이너, 부모님이 같이 살고 있지 않으니 어딘가로 돈을 벌러 떠나셨거나 아니면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다거나, 뭐 대략 그런 사연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하고 지레짐작해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곰돌이 뮤지션을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할 만큼 좋아하는 걸까, 왠지 반쯤은 허풍이고 반쯤은 주작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뮤지션의 밴드실 밖 생활을 보니 인기가 충분히 공감이 되고도 남았다. 

이렇게 착하고 순하고 다정하고 젠틀하고 앙증맞고 듬직할 수가 없다. 외모가 아니라 속을 뒤져볼 줄 아는 여자애들이 테이너가 이뻐 어쩔 줄을 몰랐다. 대부분은 그저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같은 마음이었다.

"내 새꾸 왔어? 인누 와서 앉아, 울애기."

"예쁘게도 떴네, 이 빨간 수세미는 할미 다구. 응?"

"울 곰돌이 어디 갔누? 할미가 울 곰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이런 식이었다. 이런 할미 심정은 요즘 웹툰이나 드라마를 보는 팬들의 댓글 문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테이너를 향한 애정이 뮤지션을 향한 팬심도 아니고, 뭐라고 딱히 영역을 분리하기 어려운 어떤 독특한 친구 사랑의 한 형태였다. 그런 애정을 넘어 이렇게 귀여운 곰돌이를 남친으로 두고 싶어 하는 여자애들도 제법 있었다. 나처럼 심장을 집어삼키는 드럼 소리나 둔탁한 베이스 소리, 찢어질 듯한 기타 소리를 라이브로 듣고 싶어서 찾아오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지만, 곰돌테이너의 감성 넘치는 악기 위에 바나나 우유나 초콜릿 같은 것들을 올려두고 눈웃음으로 도장 찍는 여자애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타났다.




춘희는 그런 여자애들 중 하나였다.

요즘 아이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 낡은 이름, 게다가 이건 누구나 아는 불편한 이름이 아닌가? 뒤마의 소설 '춘희(동백 아가씨)'에 나오는 바로 그 기녀의 별명. 이 소설이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로 개작되어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춘희의 어머니는 성악가였고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이 두 분이 '라 트라비아타'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춘희'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떻게 아이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을 수가 있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이 이야기에서 진정성을 느낀 테이너는 철벽 치던 마음이 녹아버렸고 그대로 춘희에게 빠져들었다. 절대로 연애하지도 결혼하지도 않겠다던, 적어도 취업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인기 있어도 여자는 가까이하지 않겠다던 18세 곰돌이 테이너에게 금기가 깨어지고 말았다.




그 금기를 지켰어야 했나, 아니면 어차피 그까짓 금기는 깨뜨려질 운명이었던 걸까?

정해진 공교육의 틀 안에서 획일적이고도 보편적인 아이들을 항상 비슷한 기준과 방향성을 향해 가르치고 있지만, 어떻게 아이들은 이렇게 조금씩 다르고 특이하고 놀라운지, 어쩌면 우린 모두 각자의 삶을 짊어진 채 잠시 학교라는 공간에 모여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곰돌테이너는 무너진 금기를 뛰어넘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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