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너의 부모님도 딱 그랬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자 새끼가 빌어먹을 아들 새끼랑 똑 닮은 게 두려웠다. 할머니께 남은 마지막 새끼, 이 손자 녀석만은 지켜내야 한다. 그래서 테이너가 유치원 다닐 무렵 멜로디언을 사달라고 했을 때 진땀을 흘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친구네에 놀러 가서 피아노를 만졌다. 태권도를 보내줄지언정 피아노 같은 건 절대로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테이너는 매일 친구 집에 가서 피아노를 두드리다 왔다. 그렇다고 계속 친구 집에 갈 순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갔다. 교회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피아노를 만질 수가 있었다. 혼자 친구 집 피아노로 소리와 화음을 터득한 테이너는 마침내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주일학교가 끝난 뒤 피아노를 어깨너머로 배웠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더 쉬워졌다.
코드라는 게 있었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코드를 배웠다. 학교 동아리를 드나들며 기타를 배웠다. 중학교에 있던 밴드부에 보컬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진정한 음악을 알아가게 되었다. 기타, 베이스, 드럼, 닥치는 대로 배웠다. 곡을 쓰기 시작했다. 멜로디를 건반으로 따면 형들이 그 위에 다른 악기들을 얹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밴드에 빠져들었다. 할머니는 몰래몰래 어딘가 떠돌아다니며 음악을 배우고 마침내 오직 음악으로 호흡하는 손자를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꼭 막아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사랑 혹은 연애 혹은 결혼이다.
아들놈이 망할 음악에 미쳐 돌아다니던 고등학교 밴드부 시절에 에미를 만났다. 아무것도 책임질 능력도 없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이 밴드인지 딴따라인지를 하다가 눈이 맞았다. 아들은 뜨거운 사랑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건지, 사람을 사랑하는 건지 구별할 순 없었지만, 두 인간들은 끝도 없이 양쪽 부모들 속을 썩이며 사랑인지 지랄인지를 하느라 난리였다. 아들놈이 미처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테이너를 낳았다. 에미라는 아이의 부모는 출산 즉시 아기와 분리하여 에미를 지방 어디 친척네로 보내버렸다. 아이를 차마 어쩌지 못해 낳는 것까지는 도왔지만 이후를 다 책임지기엔 에미도 능력이 없는 어린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생활 능력도 없는 것들을 결혼시켜서 뭘 어쩔 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들놈은 애비없이 홀로 고생고생 키우면서 못 배워먹은 놈이라는 손가락질이라도 받을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여왔는지 모른다.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아들 새끼가 사고를 쳐서 이 지경까지 왔지만, 그래도 아들이 뿌린 여린 씨는 거두어야 마땅하지 않나? 에미 집안은 아기를 포기했지만 아들의 아들은 내가 키우리라 하고, 식당 일에 손이 바쁘고 몹시 피곤했지만, 사실상 두 아들을 키우는 심정으로 고등학생 아들과 갓난 손자 녀석을 전쟁같이 키워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을 한다며 집을 뛰쳐나가 여태껏 소식이 없다. 이제 달랑 남은 손자 놈, 테이너, 이 하나가 할머니의 삶의 끈이고 전부가 되었다.
그래서 테이너는 너무 잘 안다.
음악을 한다는 것이 할머니에겐 얼마나 공포인지, 그리고 여자 친구가 생긴다는 것이 할머니에겐 얼마나 재앙 같은 일인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음악은 운명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율이 먼저 들러붙었고 외면하려 해도 핏속에 음표가 돌아다녔다. 음악 없이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건 할머니가 양보하셔야 한다. 그 대신 사랑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취업해서 결혼할 준비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할머니 등골 빼먹고 할머니 걱정시키는 짓하며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는 미친 사랑 따윈 절대로 하지 않겠다. 음악만 할 수 있으면 사랑은 필요 없다. 너무 어려서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되었던 엄마와 음악에 미쳐 날 떠난 아빠처럼 무책임한 사랑, 무책임한 음악은 하지 않겠다. 사랑은 더 커서 하고, 음악은 즐길 만큼만 하겠다. 테이너는 매일 그 다짐 속에서 노래를 불렀고, 여자 아이들의 환호도 관심도 다 거리를 두며 외면했다.
그런데 춘희.
나랑 똑같이 음악에 미쳐 사랑에 빠진 생각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거북이 등껍질처럼 음악을 등에 지고도 음악을 밀어내려고 허튼 싸움을 하는 불쌍한 춘희. 테이너는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것처럼, 음악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노래하는 자신에게 이끌려 음악과 사랑에 동시에 빠져버린 춘희가 너무나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불쌍했다. 너는 나의 데칼코마니. 이 여자는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운명과 싸워야 하는 사람의 고독은 운명과 싸우는 사람만이 이해한다.
얼마나 긴 시간을 음악에 꽂아왔던가?
얼굴도 본 적 없는 부모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그들의 무책임한 사랑을 얼마나 경멸했던가? 음악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행적을 얼마나 좇았던가? 거울을 보며 얼마나 본능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상상했던가? 그들이 남겨준 것은 어쩌면 몸도 피도 DNA도 아닌 음악 그 자체가 아닌지? 나는 그저 음악의 인격화된 한 존재, 음악을 사람의 형태로 빚어놓은 존재에 불과하지 않는 건 아닐까? 나는 뭘까? 나는 그냥 그들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작품이었을까? 영화 '어거스트 러시'에서처럼 내 음악이 혹여나 그들을 불러낼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너무 영화다. 그래도 나는 이제 괜찮다. 이젠 내 운명의 완성을 느낀다. 춘희,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 웃음을 파는 창녀에 지나지 않지만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지켜낸 라 트라비아타('길을 잃은 여자'라는 뜻), 우린 모두 길을 잃었지만 서로에게서 길을 찾았다.
테이너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이다.
매일 새로운 곡이 터져 나왔다. 가끔 그런 테이너를 볼 때, 혹시 천재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내용이 너무나 일관되다 못해 천편일률적이어서 천재설은 잠시 접어두고 그냥 사랑에 심하게 허우적대고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음악의 다른 이름은 고독이었고 공상이었고 망각이었으며 마침내 생명이었다. 그들의 위태로운 사랑과 음악에 혹여 엉뚱한 불꽃이 튀어 타타타탁 그들 말마따나 '운명'의 도화선을 타고 다이너마이트처럼 터져 주변을 파괴시키지나 않을까 종종 염려가 되었다. 순전히 그들이 떠안은 유전자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분별력 없는 아직은 너무 어린 나이로부터 온, 이 또한 합리적인 염려라고나 할까?
이럴 때 내 직관은 참으로 뛰어난 편이다.
"테이너, 좀 살살해, 운명."
"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뜨린 무거운 공도 가벼운 공도, 같은 속도로 떨어졌어요."
"뭐냐, 또 그건?"
"지금 쓰고 있는 곡이요."
사랑과 예술에 동시에 빠진 사람은 모든 대화가 시(詩)에 가까워져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행간을 깊이 음미하는 것만이 소통을 놓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운명에 속도가 있다면 아마 그럴 거예요. 지금 만났든 10년 후에 만났든, 우리 삶의 무게가 얼마가 되었든, 우린 같은 방향으로 뛰어내려 같은 속도로 사랑에 빠졌을 거예요. 10년 전이든 10년 후이든, 우린 여전히 운명을 향해 낙하하고 있을 거라고요. 중력을 거스를 힘이 없어요, 제겐. 저를 위해 예비된 단 한 사람이에요, 춘희는. 테이너의 최신곡은 아마도 이런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테이너의 서툰 한 소절을 이렇게 두고두고 해석해 보았다. 살살하라니까, 그 운명.
하지만 그 녀석의 말대로 속도 조절이 되지 않았다.
너무 빨라져 버렸다. 중력에 가속도가 붙듯, 시작보다 훨씬 운명이 무거워졌다. 춘희가 임신을 한 것이다. 하아, 사랑에 너무 많이 진지했다, 너희 둘. 그런데 너무 많이 진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왜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야?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지 않기로 해놓고. 결국 서로를 감싸 안기 이전보다 더 크게 상처를 주고받게 되었잖아! 나는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할머니가 더 걱정이 되었다. 춘희 부모님은 또 뭐라고 하실런지. 애는 누가 키우나, 이 어린 부모의 학업과 졸업은? 결혼은 하는 건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테이너가 털어놓지 않았던 그 '사연'이라는 걸, 이렇게 사고 친 뒤에야 알게 된 것도 참 기가 막힌다. 그렇게 안 한 더 다니, 연애, 결혼. 잘하는 짓이다, 미친놈.
"쌤, 울 아빠라는 사람, 참 생각이 많이 나네요."
"......"
"무서웠을 것 같아요, 그 양반. 진짜 어떻게 제정신이었겠어요?"
"무섭냐?"
"너무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제가 아빠가 될 수 있을까요?"
"준비되어 있어도 아빠가 된다는 건 조금은 두려운 일이지."
"키울 수 있겠죠?"
"네가? 너 혼자?"
"춘희 부모님이 졸업하면 결혼하라고 하시던데,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춘희 어머니가 키워주신다고."
"춘희는 뭐래?"
"아기는 포기 못한다고요. 죽어도 같이 죽을 거라고요. 살아도 같이 살고요. 결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절 못 믿겠나 봐요."
"운명이네 뭐네 해놓고 또 못 믿을 건 뭐야? 안심시켜줘. 네 마음은 어떤데?"
"그냥 복잡해요. 엄마 아빠 생각도 많이 나고. 제가 참 무거웠겠구나, 싶고. 능력이 없으니 도망갔겠거니 하고. 그래도 내가 싫어서 떠난 건 아니겠구나, 싶고."
테이너는 둥근 어깨를 한층 더 둥글게 말고 고개를 숙였다. 아기를 갖게 된 순간에도 아직 어린 테이너는 자신을 떠난 부모를 먼저 떠올렸다. 핏줄이 부르는 그리움이 눈물처럼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졌다. 테이너 부모님의 눈물과 같은 속도로.
"순서가 좀 틀려서 그렇지, 나쁜 일이 일어난 건 아니지 않을까? 소중한 생명이 왔잖아. 네가 이 세상에 왔던 것처럼. 우리 그냥 무턱대고 살아왔던 것처럼, 우리 무턱대고 기뻐하자. 지금부터 아빠 될 준비 해나가면 되지, 우린 중력을 거스를 수 없잖아. 그치?"
춘희는 졸업을 1년 앞두고 휴학하기로 했다.
가까운 친구들이라면 몰라도, 임신한 채 학교를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전교생이 지켜본다는 것이 참 불편할 것 같았다. 집에서 마음 편하게 출산하고 다시 복학하면 된다고. 그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생명을 책임져보려는 결심이 무척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춘희는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낳아 기르며, 수도 없이 삐그덕거리고 심지어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러게 왜 날 낳았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와버리곤 했지만, 그게 부모님에겐 얼마나 어려운 노력이었을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일지라도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며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는 부모님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곁을 지켜준 것만으로도 지금 자신에게 다가온 새 생명을 향한 그 어떤 결정도 후회하지 않을 힘이 되는 걸 느꼈다.
어리고 여린 부부.
아직 결혼도 혼인 신고도 할 수 없는 어린 부모. 그들에게 싹튼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새로운 존재의 무거움. 행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이 아닌 사람들이 어른 행세를 하는 교문 밖에 비해, 이 철없고 능력 없는 작은 커플은, 어쩌면 한심할 정도로 답답하고 무책임해서 화가 나기도 하는 이 똥멍충이 커플은, 아직은 교문 안에서 머뭇거리며 더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임질 능력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책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속이 뒤집어져 홀로 소주 두 병을 드시고 몸져누우셨다는 테이너의 할머니께, 증손자를 만나게 된 흔치 않은 축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테이너를 믿어주셔서 참 감사하고 멋지시다고, 더 건강하셔야 테이너도 결혼까지 마음 놓고 하지 않겠느냐고, 원하시면 이 일은 학교에서 비밀로 잘 처리하겠노라고, 외람되지만 손편지를 써서 보내드렸다.
꼬물꼬물 아기 사진이 한 장 날아왔다.
테이너는 이제 고3 봄을 맞이했다. 춘희는 산모가 되었다. 태명이 '피사'였던 아기. 3대째 음악 하는 집안, 양가의 조부모들까지도 모두 음악쟁이들. 이 아기의 미래를 남몰래 점쳐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축복한다, 아가. 파란만장한 양쪽 집안 모두의 결말이 바로 너로구나, 복덩이. 어이, 곰탱이, 괜한 금기 만들어 싸우게 하지 말고, 졸업부터 하자, 차근차근. 복덩이랑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