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가운 열정 Feb 05. 2022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50

소연의 하소연 02

소연이 어머니와의 대화가 우선이었다.

조퇴도 외출도 어려우신 어머니의 직장 생활로 인해 나는 모두가 퇴근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속상해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죄송하다고 사과할 뿐이었다. 사과받자고 모신 건 아닌데, 괜히 난 좀 겸연쩍었다. 처음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 반복적으로 어떤 특정인에게 꽂히는 건지, 아이와 얼마나 대화를 해봤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서로 충분히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는 작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다.

작년 담임 선생님의 고충이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았고, 나 역시 시간이 흘러 이번 학년도가 끝나면 아이의 비정상적인 집착도 종결되고 또 새로운 학년, 새로운 담임교사에게 애정의 촉수를 꽂을 것이라고. 그러니 그건 그냥 무작정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숙명이고 이 또한 지나가는 불편한 시간일 뿐이라고.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소연이 담임교사의 팔자, 따라서 부모가 책임지거나 해결해줄 수 없는 오롯이 담임교사의 몫, 그래서 미안한 거다. '내 아이가 당신에게 폐를 끼쳐서'가 아니라, '당신 팔자가 그러한데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거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사과받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자녀 문제에 이렇게까지 평안할 수가 있나, 황당하다 못해 살짝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무책임한 거야? 애가 교사를 스토킹 하는데, 우리 애가 왜 이럴까, 하는 고민 따위는 없어도 되는 거야? 스토킹 당하는 사람 입장은 또 왜 이렇게 배려하지 않는 거지? 처음에 자리에 앉자마자 무턱대고 내뱉었던 그 '사과'가 이런 의미라는 걸 알고 곧장 문제점을 깨달았다. 




공감력 제로.

상대방이 어떤 감정인지, 지금 교사 입장이 어떠할지, 적어도 부모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아이가 해마다 사람을 바꾸어가며 일 년 내내 집착을 이어갈 때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감정적인 교감도 없다. 소연이 때문에 어머니가 지쳐서 그러시는 걸까, 아니면 이런 모습에 소연이가 지쳐서 이렇게 되어간 걸까? 소연이가 누군가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감정을 줄줄 흘리며 일방통행으로 달리는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힌다. 문득 이 답답함을 강하게 호소하고 싶어진다. 내가 받은 편지들을 보여주고 싶고, 도배된 카톡방에 갇힌 소연이의 메아리를 들려주고 싶다. 시작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당신의 자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부모로서 일말의 책임감이나 최소한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주고 싶다. 매일 나 힘들다고 팍팍 티 내고 싶다. 자녀 일에 대해 신문 기사 읽다가 혀나 쯧쯧 차면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남의 일처럼 여기는 이런 건조한 태도에 집념을 불태우고 싶어진다. 관심을 끌고 싶다. 나도 소연이랑 똑같이 내가 매일 받은 편지마다 사진 찍어서 이 어머니에게 보내고 싶고, 소연이와의 카톡방도 매 순간 캡처해서 때마다 부지런히 보내주고 싶다. 이 어머니는 사람에게 쓸모없는 집념을 불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부글부글. 




하지만 더 이상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소연이가 피아노를 잘 치더라고요."

"네, 그래도 피아노는 열심히 연습해요."

"연주하는 것도 종종 들으시나요?"

"제가 음악을 잘 몰라서요."

지식으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건데.

"소연이가 글도 제법 잘 써요."

"......"

역시나 관심이 없는 건가.

"거의 매일 제가 받은 편지를 보면, 자기 생각을 그럭저럭 잘 풀어내는 편이에요."

"하도 써대니까 글도 느나 보네요."

"어머니도 혹시 소연이 편지 받아보셨어요?"

"소연이는 아니고요. 소연이 아빠가 그랬어요. 4년을 쫓아다녔어요, 그 양반이. 매일 편지, 매일 전화......"

"어머, 정말요?"

"지긋지긋했어요. 그때만 해도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 주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행복한 거라고, 그 남자가 진짜 일편단심이라고, 평생 사랑받으면서 살면 된다고들 했어요. 너무 지겨웠지만 그게 사랑이려니 했어요."




스토킹 대물림, 그게 가능하다고?

물론 가능하다. 삐뚤어진 집착으로 어그러진 관계를 맺던 사람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애착을 형성해나가기 어렵다. 가족으로 묶여 사랑인지 폭력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애매한 경계로 만든 집. 집착하는 아이에게서 접착력이 강한 남편의 촉수를 느끼며 점점 감정을 잃어갔다. 그래도 '정 떨어지는' 감정이나마 느낄 수 있는 어머니는 아직 희망이 있다. 하지만 그런 아빠의 촉수에 밀려난 아이의 촉수는 갈 곳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다 엉뚱한 곳에 정기적으로 플러그 인 아웃을 반복하고 있다. 내 콘센트에서 소연이는 너무 많은 전하를 흡수하려 든다. 바다에 표류하다 바닷물을 마시고 더 갈증이 심해진 사람처럼, 플러그 인은 마음의 전해질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이 고리를 먼저 끊어내야 하는데, 누가 먼저 한 발씩 물러날 것인가? 어머니는 소연이의 가늘고 섬세한 촉수들이 당장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재앙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아이와의 어떤 소통도 일체 외면하고 있다. 미안한데, 나도 아파 미칠 지경이니 건드리지 마슈,라고. 각자의 몫에 비틀거리며 이렇게 사는 거라고. 그 남자에게는 대체 가능한 존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소연이에게는 수없이 많은 대체품들이 존재해서 다행이라는 듯. 평생을 짊어져야 할 당신의 고통에 비해 담임교사는 1년 계약직이니 너무 불평하지 말라는 듯. 위독한 아이의 수술을 집도할 의사가 더 위독하다. 늘 이런 식이다, 젠장.




며칠 뒤, 소연이가 조퇴하겠다고 했다.

일이 바쁜, 아니 일이 바빠야만 살 수 있는 어머니가 큰맘 먹고 휴가를 써서 아이와 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상담 한두 번으로 나아질 문제는 아니다. 근본적인 것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소연이는 약이 맞지 않아 몇 차례 구토와 이명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냥 약 복용을 중단했다. 병원에서는 아이와의 지속적인 상담을 원했지만 진짜 상담이 필요한 건 어머니였을 것이다. 병원을 두어 차례 들락거리다가 중단하고 나서, 소연이는 자신의 문제에 누군가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좋아서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제 문장 자체가 더 자극적으로 바뀌었다. 




죽고 싶을 땐, 희열을 느껴요. 

상상만 해도 짜릿하거든요. 그러다 문득 누가 날 위해 슬퍼해줄까, 떠올려보면 슬퍼해줄 사람이 별로 없어서 죽기 싫어져요. 가끔은 내 물건들을 많이 챙겨서 쌓아두고 싶어요. 내가 죽고 나면 엄마가 내 물건들을 보면서 내 생각을 더 하려나 하고요. 아까는 앞에 앉은 애가 내 펜을 빌려갔어요. 저는 그 펜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기억을 못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죽으면 그 아이는 내 펜을 보면서 아, 이거 소연이 펜인데, 하면서 내 생각을 잠시라도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재미있어요. 선생님은 이렇게 편지를 많이 받았으니까 내 생각이 진짜 많이 나겠네요. 잊지 말고 기억해 주세요. 꼭이요. 선생님은 해마다 거의 200명의 학생들을 만난다고 했죠? 10년이면 2000명, 20년이면 4000명쯤 되겠네요. 그중에 '소연'이는 얼마나 많을까요? 전 이름도 흔해서 싫고, 성격도 소심해서 싫어요. 선생님은 어쩌면 그 많은 소연이들 가운데 저를 기억한다는 게 쉽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기억해 주세요. 선생님은 기억력이 좋으실 것 같아요. 그렇죠?




아빠를 보면 엄마를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걸 보면 사랑은 주는 것이 행복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도 행복합니다. 주는 사랑으로 마음이 꽉 차 있어서 받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아요. 그래도 연애하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어요. 어떤 남자가 나를 사랑해줄까? 마음을 빼앗길까 봐 남자애들 얼굴도 잘 못 보겠어요. 짝사랑이 제일 재미있는데, 너무 티가 많이 날까 봐 걱정이에요. 선생님은 걱정 없이 마음껏 좋아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어쩌면 나는 동성애자일까요? 남자보다 여자인 선생님이 더 좋으니까요. 레즈비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영원히 선생님만 사랑할 거예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다.

그래도 주제는 선명하고 글쓴이의 의도가 손에 잡힌다. 독자의 관심을 끌고 어떤 반응이라도 반드시 이끌어내겠다는 의지. 이런 독한 단어 몇 개 투척하면 슬슬 입질이 올 것이라는 확신. 어수룩한 척하면서 사실은 앙큼한 여우같이 어떻게든 눈길 한 번이라도 낚아내겠다는 미끼들이 가득한 이런 편지들이 쌓여가도, 나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파악한 소연이는 내가 흔들바위 출신이라는 걸 눈치챘나 보다. 나는 순간 '흔들' 했다.




선생님, 오늘이에요.




이 카톡에,

오늘? 뭐가? 왜? 무슨? 어떤? 오늘? 무슨 오늘? 뭐하는 날인데? 왜? 많고 많은 날이 있는데, 오늘이라니, 무슨 오늘? 아니, 어떤? 뭐? 뭐라고?




소연이의 편지나 카톡은 종종 불길한 기운을 품는다.

그래도 항상 맹목적인 '사랑', 결코 사랑이 아니지만 스스로 그렇게 정의한 그야말로 맹목적인 집착으로 인해 최악의 행동은 자제하는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므로. 그 집착이 사는 힘이 되기에. 그걸 알기 때문에 어지간한 낚싯줄에는 걸려들지 않고 철벽 치며 무심할 수 있다. 스토킹은 무조건 거절과 무관심이 최고의 대응책이라고, 상담 선생님도 작년 담임 선생님도 한 목소리로 귀띔해준 바 있다. 그랬건만 '오늘'이라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단어에 내 심장이 흔들, 고고한 설악 일대를 내려다보며 어떤 비바람에도 굽히지 않던 울산 흔들바위가 이 작고 평범한 문장에 소스라치게 골짜기로 굴러갈 기세로 흔들렸단 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어디니?

집이요.

무슨 오늘?

선생님을 사랑한 지 200일 되는 날이에요. 오늘이.


9월 17일.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날, 3월 2일부터 지금까지 벌써 200일이 흘렀고, 난 줄곧 200일간 이렇게 된통 시달렸고, 이 아이는 대답 없는 사랑에 목이 말라 혼자만의 우물을 이렇게도 깊이 파고 있었구나. 200일. 


그래서? 오늘 200일인데, 그래서?

그냥, 기념하고 싶어서요. 

그게 다야? 기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죄송해요, 선생님. 케이크라도 사다 놓고 사진 찍어서 보내려고 했는데, 기념이 너무 밋밋하죠?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됐다. 

네, 내일 봬요, 선생님.




이 모든 상황은 교사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교장 선생님께 직접 이 문제를 의논드리고, 내 고통을 호소했다. 교사는 수업이나 아이들의 안전의 책임이 막강해서 아무렇게나 연가나 반차 같은 걸 쓰지 못한다. 시간표 조절도 매우 빡빡하고 맡은 학급의 업무도 적지 않다. 어디 아파도 일단은 출근하고 봐야 하는 극한의 노동직, 그리고 모든 상황을 내적 성숙과 사리 수 만 개가 나올 인고의 내공으로 견뎌야 하는 성직, 자기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먼저 보살피고 응대해야 하는 서비스직,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는 전문직이면서도 사람을 대하며 존중하는 인간 친화적인 직종,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신기한 직업 중 하나가 교사가 아닌가. 그래서 견뎠다. 더 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더 품을수록 더 아프게 된대서 접었다. 그러다 나도 아팠다. 그래, 나도 아팠다. 




간단한 서류를 구비하고 무려 일주일간의 병가를 냈다.

일단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좋은 요법이 될 것이라는 전망, 하지만 효과를 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방학 때에도 대화방 도배질로 내 빈자리를 촘촘히 메웠던 걸 생각하면 일주일 비운다고 딱히 달라질 걸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소연이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학교에 나오는 시기에 나만 덩그러니 자리를 비우는 것이 새로운 국면이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감, 그리고 서둘러 이루어진 극적인 후처치가 있었다. 나는 병가를 내기 전에 어머니에게 이 모든 상황을 전하고 한 가지 제안을 드렸다. 소연이가 두고두고 촉수를 꽂을, 아니 애정을 퍼부을 조금 더 안정적인 관계, 하지만 그 관계성에서 소연이가 우위를 점하고 마음 편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관계, 한번 마음을 주고 나서 마음을 다칠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일방적이어도 어렵지 않고 또 순수하게 쌍방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오히려 관계의 책임감까지 훈련할 수 있는 관계, 다 차치하고라도 소연이가 마음껏 사랑을 해도 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주자는 것. 

"그런 존재가 어디 있어요?"

"해보는 거죠, 뭐. 어머니, 강아지 한 마리 입양하는 거 어떠세요?"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끄고 잠시 사라졌다.

출근하지 않아도 내내 소연이 생각이 났다. 집착받던 사람도 그 집착에 길든다. 좋든 싫든 점점 익숙해져 버린다. 벗어나도 한동안은 자신도 모르게 먼저 생각하게 되고 종종 긴장하게 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으로 멍하게 일손을 놓게 된다. 일주일 간 집에서 유유히 시험 문제를 만들고 밀려있던 수행 평가를 채점하며 복귀할 때 밀어닥칠 업무들을 놓지 않고 있었으나, 가장 놓지 못한 일은 '불안'이었다. 이젠 진짜 내가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진단서나 병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치료 말이다. 




학교로 돌아왔다.

옆 자리 선생님이 싹 버리려다 혹시나 해서 먼저 뜯어봤다며 소연이 편지를 한 뭉치 전해주셨다. 대체로 입양한 강아지의 근황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소연이를 불러 이걸 편지로 쓰지 말고 일기로 써보라고 했다. 편지는 보내고 나면 이 강아지에 대한 육아 기록이 다 사라지니까 아쉽지 않겠냐고. 일기로 남기고 사진도 찍어서 남기면 어떻겠냐, 요즘엔 폰으로 찍고 블로그로 올리니까 더 편한 세상 아니냐, 넌 글을 잘 쓰니까 좋은 애견 블로그가 될 것 같다고. 이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거다, 혼자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때론 사랑이 아니다, 네 따뜻한 마음과 재능을 허비하지 말고 소중하게 사용해라, 너를 응원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라고. 애견 '쌤'(개 이름도 참 묘하다.)에 관해 썼던 일주일 간의 편지 뭉치를 되돌려주며 나는 마지막 선을 그었다.




소연이는 거의 매일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누가 자주 방문하거나 말을 거는 것도 아니건만, 매일 조금씩 다른 각도로 찍은 '쌤'. 비록 '선생님'은 아니지만 '쌤'에게 두레박을 옮겨 혼자 파온 깊은 우물을 길어 붓기 시작한 소연이. 어쩌면 이것 역시 임시방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치유는 분명 아니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소연이가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나 관계를 맺는 방법이 달라질 계기를 마련하기엔 한계가 있다. 시작은 가정으로부터, 가족과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이 괴리에서 삐져나오는 것이다. 




가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연이의 시선을 느낀다.

그래도 불안해하지는 않기로 한다. 애정은 책임의 또 다른 말이다. 소연이의 '쌤'은 오직 소연이의 손길을 원한다. 그런 '쌤'이 곁에 있는 한, 차가운 바람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혼자 품은 사랑이 칼날처럼 나부끼던 시간 대신 잠시라도 되돌려 받을 온기에 기대어. 그리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가끔 엄마랑 같이 찍은 강아지 사진을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도리도리. 이젠 나도 습관적으로 소연이의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는 이 이상한 미련을 내려놓기로. 안녕, 소연.










이전 24화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4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