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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Mar 25.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17

잘못된 만남 01

향기가 화장을 시작할 무렵, 향기의 변화에 반응이 아주 많이 뜨거웠던 한 아이가 있다.

이름은 희수. 입학식 날부터 눈에 띄었다. 유난히 마르고 긴 몸에 뽀얀 피부, 귀 뒤로 한쪽만 쓸어 넘긴 단정한 단발머리, 그런데 엉덩이를 간신히 가린 교복 치마 대신, 그 아이는 교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요즘엔 치마 대신 바지를 입는 여학생들도 많으니까. 우리 반 셰프 모델은 워낙 딱 봐도 걸어 다니는 화보라 눈에 띄었고, 희수는 그럭저럭 길쭉한 맛이 있어서 모델이랑 나란히 서 있으면 그 나름대로 순정만화에서 툭 튀어 나온 만찢남과 만찢녀 같은 느낌이 났다. 입학식 날, 그렇게 둘이 우리 반에 나란히 서 있을 때, 화려한 셰프의 얼굴과 그 옆 화려한 희수의 메이크업이 무척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었던 기억이 난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에서 담임과의 시간이 있었다.

출석을 부르고 얼굴을 확인하면서도 별로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난 좀 긴장했고,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당분간 번호대로 앉도록 했다. 얼굴과 이름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희수는 여학생 중 첫 번호여서 그 뒷자리로는 쭈르륵 몇 안 되는 여학생들이 앉았다. 우리 반 명수와 출석인원이 딱 맞았다. 입학식에도 출석률이 백 퍼센트가 아닌 학급도 있는데, 이만하면 우린 나쁘지 않다. 



희수는 애교가 많았다.

내가 출석부를 들고 교실로 가면, 복도에서 쪼르르 마중 나와 출석부를 받아 들고, 한쪽 팔은 다정하게 내게 팔짱을 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톤이 상당히 높고 말투는 여우같이 야무졌다. 키는 왜 이렇게 큰 거야, 175cm란다. 여자애 키치곤 꽤 크다. 오늘따라 컬러 렌즈가 너무 파래서 외국인 같다. 어머, 선생님도, 호호호, 말투도 야실야실해서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을까 봐 걱정이다. 하지만 그나마 얌전하게 바지라도 입고 다니니 다행이지 뭔가?



샛별이니 뭐니 해서 학기 초가 전쟁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는 교무실을 뛰쳐나간 샛별이를 찾으러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수업 시작 종이 쳤고, 나는 헛걸음을 쳤다. 터덜터덜 복도를 지나가는데, 희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수업 시간 중에 화장실을 돌아다니다니, 혹시 흡연한 건 아니겠지, 잠시 의심하려다 말았다. 난 이미 지쳐 있었다. 앗, 그런데, 방금, 내가 잘못 봤나?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희수는 그대로 이미 복도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니지,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상하다, 왜 저 아이가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거야? 멍하니 서서 내 눈을 의심하다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선생님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나에게 확인을 부탁한다며 출석부를 내밀었다. 우리 반 아이들의 명단과 사진이 정리된 첫 페이지. 이게 뭘 어쨌다는 거지? 체육 수업 중에 성별을 구별하여 조를 짜는데, 아이들이 자꾸 희수를 데리고 장난을 친다고 화를 내셨다. 선생님은 희수를 여학생 조에 넣으려고 하는데, 남자아이들이 못됐게 희수를 자기네 조에 데려가겠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희수가 키가 유난히 크고 남학생 조에 들어가도 별로 부족할 게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희수가 당황스러웠겠다. 키 크다고 이 무식한 놈들에게 놀림받는 건가? 얼굴을 찌푸리는 나에게 체육 선생님이 다음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선생님, 희수가 '남자'입니까? 저 놈들이 희수가 남자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못 들은 척하려는데, 선생님이 못 믿냐며 출석부를 보여주네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진짜 출석부가 이렇잖아요? 이게 잘못될 리가 없는데. 이 명단은 학적 담당이 입학 전부터 관리하던 것 아닙니까? 걔 얼굴 좀 보세요. 어딜 봐서 남자애란 거예요? 빨리 등본이든 학적이든 들어가서 확인 좀 해주세요, 네?"



어머나, 그날 그 화장실!

후들후들 키보드를 두드리고 확인해본 결과, 정말이다.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지경이다. 아이들이 장난친 게 아니었다. 가뜩이나 향기가 외롭다는 말을 던지고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복잡하던 참인데, 이 아이는 또 대체 뭐냔 말이다. 우선 정신을 가다듬고 흥분한 체육 선생님께도 '조' 문제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인 것이 확인되었으나, 아이가 남학생 조에서 즐겁게 수업을 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뭔가 마음이 쉽지 않았다. 희수를 일단 만나면, 그다음엔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붙잡고 너 남자였니, 할 것인지, 오해한 게 미안하다고 할 것인지, 왜 나는 자꾸만 뒤죽박죽인지, 향기의 외로움보다 더 나를 복잡하게 했지만, 나는 우선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수야."

"네, 쌤."

"미안해."

"네, 쌤."

"뭐가 미안한지 알고?"

"체육쌤이 말했죠?"

"응."

"쌤, 몰랐죠?"

"으응."

"그런 것 같더라고요. 남자애란 걸 아셨으면, 제가 팔짱 끼고 그러는 것도 등짝 스매싱인데."

"응. 맞아. 근데 왜 말 안 했어?"

"쌤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그치? 담임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그치? 미안해."

"몰라서 좋았어요, 사실. 그게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이러는 게 싫어서."

"뭐가 싫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예쁜 게 좋아서 이러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남자인 게 불편하더라고요. 면도도 매번 해야 되고. 입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입고. 그냥 한번 입어봤는데, 왠지 의식되고 그래서 입고 나가진 못하겠더라고요. 그냥 생각이랑 현실이 안 맞으니까 불편하죠. 그게 싫어요."

"근데 얼굴은 풀 메이크업하잖아."

"이건 이제 좀 익숙해서요."

"친구들은 다 알지?"

"아는 애들은 다 알죠. 모르는 애들은 모르는 채로 사는 거고. 서로 부딪힐 일 없으니. 생각보다 오해 많이 해요."

"생각보다? 야, 이건 말 안 해주면 알기 어렵지. 생각보다 오해가 많은 게 아니라, 당연히 오해가 많은 거지."

"이래서 불편해요."

"앞으론 더 그럴 텐데."

"감수해야죠, 뭐."

"이러고 집을 나서면,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니?"

"이젠 좀 포기했어요, 엄마도. 저 집에선 종종 원피스 입고 있어요. 엄마랑 둘이."

"웃음이 나냐? 엄마는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시는 거야?"

"몰라요. 옛날엔 진짜 많이 싸웠어요. 이러다 저 군대도 가야겠죠?"

"어머, 그러네. 진짜 불편하겠다, 너. 군대는 나중 일이고, 당장 체육 조는 어떡하니?"

"진짜 싫은데. 쌤, 쌤이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러게. 근데 네가 여자애가 아니잖아. 그냥 생물학적으로 남자 애니까, 남자애처럼 마음 편하게 하면 안 되나?"

"쌤은 그게 될 것 같아요?"

"아니."

"저 그냥 여자애들이랑 같은 조 하면 안 돼요?"

"여자애들은 남자애랑 같은 조 하는 게 불편할 거 아냐."

"애들은 내가 남자로 안 보이죠. 우린 목욕탕 빼곤 어디든 다 같이 다녀요. 쌤은 내가 남자 같았어요?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예요. 걔넨 걱정하지 마세요."



체육 '조'끼리 수행해야 하는 것은 다행히 배드민턴이었다.

아직은 괜찮다. 배드민턴은 남학생 조에 가든 여학생 조에 가든, 서로 굳이  몸을 부딪히거나 하는 종류는 아니다. 하지만 희수의 정서를 고려하여 체육 선생님과 학년 부장님이 다 모여서 이 아이의 '조 편성' 문제를 심도 있게 의논했다. 적어도 경기를 진행하고 성적에 반영하기 위한 조건의 형평성은 필요하기 때문에, 파워와 키가 다른 희수가 여학생들과 겨룰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희수는 '남학생 조'에 편성되었다. 



조 편성은 그렇다 치고, 이 아이의 마음과 사회적 젠더 편성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도저히 나에겐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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