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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Mar 27.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18

잘못된 만남 02

나는 운동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특히 배드민턴에는 조금 자신이 있다.

지난 학교에서 배드민턴의 '신'이라고 불리는 학생과 방과 후에 자주 연습하면서 실력이 제법 늘었다. 그 녀석은 셔틀콕을 짧은 오른쪽, 긴 왼쪽, 네트 코앞 등등 자유자재로 위치를 바꿔가며 떨어뜨렸고, 나는 마냥 똥개같이 헐떡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순발력도 늘었고 눈치도 늘었다. 버릴 패를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았고 다음 플레이를 예상해볼 여유도 생겼다. 



그 실력을 발판 삼아 이 녀석들의 기세를 한번 제대로 꺾어볼까, 하고 감히 나섰다.

그 학교에 비해 이 학교는 흡연율 음주율 결석률 지각률 및 각종 사고율이 높은 편이라, 이런 멘털과 전 육신의 소유자들이라면 내 나이와 성별에서 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간 닦은 실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쎈캐답게 한번 발라주마, 오늘 나랑 쭈쭈바 내기 걸고 한판 붙을 사람? 그러자 날 지근지근 밟아주겠다고 덤비는 놈들과 웬 동네 바보랑 놀아주고 쭈쭈바를 얻어먹겠다고 덤비는 놈들, 그리고 계급장 떼고 노는 것 구경하겠다고 덤비는 놈들이 우르르르 떼로 몰려들어 대기표를 뽑아야 할 판국이다. 



사실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 나는 반 사설탐정이 되었다.

뭘 하든 세심하게 관찰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봐야 한다. 사건과 생활은 항상 가까이에 있고, 나는 해결사가 아니라 안내자일 뿐이다. 많은 정보를 얻되 신중해야 하고,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들도 모르게 어느새 가까이에 와 있고,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어느새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체육 선생님의 동의를 얻어 체육 수업 끝날 무렵 자유 경기 시간에 나는 두 번의 도전장을 던졌고, 두 번 다 슬프게도 아이스크림 비를 탈탈 털리며 희수를 은근히 관찰할 수 있었다. 



희수는 체육시간에 생각보다 훨씬 잘 지냈다.

원래가 남자아이인데, 뭐 어색할 것이 있겠는가. 물론 워터프루프라고는 해도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며 얼굴 메이크업이 망가지는 게 속상해 보이긴 했지만, 체육 능력은 누가 뭐래도 남성미가 넘쳤다. 예쁘장하다고 느꼈던 얼굴이 격한 호흡에 일그러지면서 영락없는 승부욕에 불타는 상남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왜 나는 저런 애를 여자애처럼 느꼈더라, 오랜 오해의 시간이 오히려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였다. 여학생 조에 편성했으면 정말 억울할 뻔했다. 모름지기 남자는 그냥 남자일 뿐이다. 경기 중 만난 희수는 그냥 키 크고 날쌘 체육돌이었다. 



희수의 조 편성은 사실 큰 고민거리가 될 것도 아니었건만, 그래도 기념비적인 일이 되었다.

왜냐 하면 앞으로 수없이 많을 성별 조 편성에 선을 확실히 그어두지 않으면 희수 입장에서나 선생님 입장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애매하고 불편한 일들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생물학적으로 정해진 성별에 대해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여 특별한 대우받기를 마땅히 여기는 것은 단체 생활에서 곤란한 일이다. 



희수는 사실 특별한 요청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뭔가 과격하게 전교에 커밍 아웃이라도 해버리려던 것도 아니었고, 섬세한 배려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나랑 생활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딱히 만족스러웠던 것도 아니다. 여자처럼 예쁜 게 좋지만 그렇다고 남자인데 여자 대우받는 것도 낯설었다. 그렇다고 완전 머슴애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집에서는 여장하고 온갖 메이크업과 헤어디자인으로 러블리한 셀카를 찍으며 쏠쏠한 재미를 챙겼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게 행복한 것도 아니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선생님께 속사정을 밝히고 나니 오히려 더 우울해졌다.



그런 희수를 만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메이크업을 안 했다. 수염이 돋아났는데 면도도 제대로 안 한 것 같다. 피부가 까실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누런 쌩얼에 반듯하게 다듬은 눈썹이 묘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더 우울한 건 표정이다. 가뜩이나 낯빛도 안 좋은데 축 늘어진 눈매와 생기 잃은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마른 어깨 위로 늘어졌다. 쌤, 쌤, 부르던 톤 높은 목소리도 낮고 묵직해졌다. 전체적으로 하여간 기가 죽었다. 막 애견 미용실에서 털 깎여서 나왔을 때 완전히 주눅 들어 꼬리가 아래로 쑥 떨어진 강아지같이, 삐쩍한 옷걸이에 대충 교복을 걸어놓은 허수아비같이, 우리 희수가 영 딴 사람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희수야. 잠깐만 와봐."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도 없이 따라온다.

"나 메이크업 좀 해주라. 지금."

"네? 제가요? 왜요? 지금요?"

"질문은 차차하고, 일단 내 얼굴 좀 어떻게 좀 해줘 봐 봐. 응?"

"아, 이건 내 분야이긴 한데. 어머, 쌤, 왠일이야."

"야, 나 이따 새로 온 쌤들 무슨 사진 찍으러 내려오래서 시청각실 가야 되는데, 내 꼴 좀 봐라. 헬프 미."

"어머, 쌤, 파우치 이거예요? 뭐가 하나도 없네요. 잠시만요."

"있을 것 다 있어, 이래 봬두. 야, 희수씨, 어디 가?"

그러더니, 사물함에 고이 모셔둔 소중한 파우치를 가져온다. 부피와 무게가 이미 제 말마따나 전문가급이다.

"어머, 쌤, 피부가, 어머, 왠일이야. 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피부가 왜 이 모양이에요?"

"야, 그렇다고 남의 집 우환까지 들먹이기 있어? 그렇게 심각해?"

"쌤, 쌤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없네요, 진짜. 일단 이것부터 하고, 이따 관리법도 알려드릴게요. 그런 거 너무 안 하시나 보네."

"알았어. 너무 과한 거 싫어. 나 자연스러운 거, 알지? 응? 내추럴 페이스에 싱그러운 봄햇살 같은, 알지? 응?"

"쌤, 쉿,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쌤은 과해지지도 않는 얼굴이에요. 너무 평면이라. 이렇게 입체감 없는 얼굴도 찾기 어려운데. 어쨌든 동안 페이스, 갑니다."

나는 생각지도 않게 난생처음 남정네의 손길에 내 얼굴을 맡겼다. 책상 위로 펼쳐진 도구들이 어지간한 여자애들 뺨친다. 향기가 화장을 시작할 때, 교실에서 틈틈이 하이톤에 격한 감탄을 내지르며 들러붙어 찍어 발라주던, 바로 그 도구들이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모험을 저지르는 중이다. 오늘 과연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나 있을까?



"자, 완성. 보시죠, 쌤."

거울을 들이미는 희수의 노메이크업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거울 속의 내가 누구더라, 잠깐 와락 큰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이상해서가 아니라 너무 만족스러워서. 너무 예쁘잖아. 역시, 나도 바르면 되는 위인이었던 거야. 알 수 없는 안도감까지 든다. 

"으흠, 동안 맞네. 내가 알고 보면 참 동안이야, 그치?"

"쌤, 쌤은 동안 되시려면 피부부터 어떻게 좀 해보세요. 그 피부로는 이 화장도 오래 안 가요. 후딱 사진만 찍고 나면 다 날아갈 걸요. 우리 쌤 피부 어떡해~~."

"야, 발라도 안 되는 사람도 있어. 난 발라서 되는 거면 좀 희망이 있는 거 아니야? 응? 진작 좀 이렇게 하고 다닐 걸 그랬나 보다. 우리 희수 이제 보니 금손이네, 금손."

그 사이 내 책상에 벌려둔 장비들로 희수는 화색이 돈 얼굴에 스스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내 피부에 대한 경고와 관리법을 떠들어대면서, 여기가 교무실인지 교실인지, 혹은 파우더룸인지 스스로 이미 시공간을 잊은 지 오래, 서서히 맥아리 없이 꺾여가던 꽃망울에 힘이 바짝 들어와 꼿꼿하게 하늘을 향하며 꽃망울을 터뜨릴 것만 같이, 마법처럼 희수는 피어나고 있었다.



메이크업 붓만 잡으면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아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은 눈빛. 

이건 어쩌면 아티스트의 정열이 아니고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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