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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Mar 28.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19

잘못된 만남 03

희수는 매일 죄짓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엄마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아들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으셨고, 그런 엄마의 눈치를 보는 것이 괴롭긴 아들도 매한가지였다. 남의 집 아들놈은 집구석에서 씻지도 않고 드러누워 방문 열면 홀아비 냄새가 날 지경인데, 우리 집 아들놈은 아침저녁 씻고 팩 붙인 채 걸터앉아 다리털 제모하랴 눈썹 뽑아대랴, 방문 열면 무슨 짓을 하는지 꼴 보기가 겁이 난다. 어떤 날은 정말 씻지도 않고 남의 집 아들놈 같이 드러누워 있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또 다른 의미로 덜컥 겁이 난다. 저러다 혹시 많이 우울해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무슨 뷰티 프로그램이라도 틀어놓으면 슬그머니 기어 나와 밥이라도 먹어주니, 이걸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러니 희수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취향은 취향일 뿐이라고 다짐해본다.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예쁜 게 좋다. 어떻게 하면 더 예뻐질 것인지가 자꾸 생각나고 어떻게 하면 그 예쁨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새롭게 더 예뻐질 것인지를 고민한다. 다만 하필이면 그 예쁨이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취향에 맞지 않을 뿐이다. 만약 남성적인 아름다움이 취향에 맞았다면 고민도 없이 헬스장에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으로서 여성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자괴감을 준다. 한껏 화장발을 올렸다가 파르르 푹 꺼진 텐션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욕구와 죄책감을 저울질하는 것도 피곤하다.



이게 정체성의 문제든 아름다움의 문제든, 표현하고 해소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희수는 화장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옷을 잘 챙겨 입으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처럼, 메이크업을 빵빵하게 하면 뭔가 스스로 존중받는 기분이 들고 그날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든지 화장은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하지만 예쁜 것과 여성성을 일치한다고 여기고 예쁜 것을 추구하면서 그 혼동으로 여성성을 같이 추구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희수가 사실 여성스럽긴 하다. 말투며 몸짓이며, 왜 아니겠는가? 예쁜 건 다 여자애들이 갖고 있으니, 다 갖고 싶은 거겠지. 그 말투도 행동도 다 흉내 내고 싶었겠지. 운동할 때 나오던 본능적인 남성성, 악착같은 승부욕, 자기도 모르게 조절이 안 되고 넘쳐흐르던 파워, 왁왁 거리며 뛰어다니던 성질머리, 그리고 그때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던 억압되지 않은 환희, 이런 것도 희수의 또 다른 얼굴인데, 그걸  자꾸 외면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제법 긴 시간 고민했던 것들을 드디어 정리했다.



"메이크업 자격증이요?"

"뭘 놀라고 그래? 취미와 재능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면 되는 거지."

"어머, 쌤. 정말요? 그런 걸 제가요?"

"누군가는 너의 금손을 원하고, 너는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원하고, 그렇게 먹고사는 거지 뭐."

"쌔앰~, 어머, 어떡해~~."

마스카라가 번질까 봐 눈을 위로 향해 깜빡거리며 딱히 소용도 없는 손부채질, 연신 어머 타령이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 그간 눌렸던 마음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한껏 명랑하게 떠들었다.

"너 좋아하는 메이크업, 아주 실컷 해라, 남의 얼굴에 실컷 그리면 되잖아. 피부 관리법도 실컷 배우고, 피부도 자격증 따면 좋지. 화장품 회사 들어가도 좋고. 안 그래?"

"너무 좋아요. 쌤, 생각도 못했는데, 세상에."

"자꾸 연습하고 자격증도 따고, 그러다 보면 자기 얼굴에 그리는 건 좀 지겨워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 예쁘게 만들어주면서 대리만족 느낄 수도 있고. 꼭 원피스 입지 않아도 남들 예쁘게 옷 입혀주면서 같은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 메이크업 싫으면 패션 디자이너는 어때?"

"싫다니요, 어머, 쌤, 저 정말 오늘 너무 감동이에요."

"그냥 제안일 뿐이니 너무 생각 없이 덤비지는 말고. 어머니랑도 잘 상의해봐. 그것도 길이 다양하니까."



깡총거리며 메이크업 파우치(거의 가방)를 들고 교무실을 나간 희수.

그날 밤, 긴 웨이브 머리에 개나리색 얇은 니트를 입고 활짝 웃는 풀 메이크업의 희수 셀카 사진과 함께 짧은 이별 인사가 카톡으로 올라왔다.

'쌤, 예쁜 희수는 이제 안녕.'

헉, 이러고 놀았단 말이야? 정말 너무 예쁘잖아.

'그럼 이제 화장 안 해?'

'쌤, 안 하긴요. 더 실컷 하라면서요. 저 아카데미 알아봤어요. 엄마가 한번 해보래요.'

'어머, 잘 됐다. 신나겠네, 희수.'

'근데, 필기도 있어요. 극혐.'

'필기만 패스하면 실기는 거저 먹겠다, 우리 희수.'

'쌤, 팩 하나 붙이고 주무세요.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던데.ㅋㅋ'

'시끄러워. 내가 너네 때매 이렇게 늙는 거야. 알기나 해?'



과연, 여성스러운 희수의 예쁜 취향이 진로로 전환되어 정체성의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사실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죄책감 대신 자긍심으로, 못된 취미 대신 뛰어난 감각으로, 소중한 재능을 골방이 아닌 문밖으로 살짝 전환할 수만 있다면 이런 답답한 생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점쳐 본다. 나중 일이긴 하지만, 그 뒤로 교내 축제 때 희수를 주축으로 만든 전문 메이크업 부스가 예약이 폭발해 그날 희수가 점심을 못 먹었다. 몇몇 예쁜 선생님들도 그날 희수 표 얼굴로 다녀 희수네 부스 홍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매일 죽고 싶었던 희수의 인생에 그날이 가장 행복하고 제대로 된 날이었노라고, 종일 남의 얼굴 들여다보느라 거울도 못 들여다본 희수가 마스카라 다 번진 얼굴로 나타나 말했다. 좀 지쳐 보이긴 했지만 뒤늦게 내가 축제 부스에서 사다둔 부침개를 씹으며 또 내 피부만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직업병이다, 정말. 그 세밀한 눈빛. 그건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냥 전문가의 얼굴이다. 애매한 여성스러움을 그냥 예쁨의 추구로 살짝 방향을 틀어나가길 바랄 뿐이다.



희수야, 예쁘다고 다 여성스러운 건 아니야. 

여성스럽다고 다 예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남성미 넘치고 안 예쁜 여성들도 있어. 날 보면 너무 잘 이해되지 않아? 쩝. 네 말대로 팩이나 하나 붙이고 자야겠다. 내일은 좀 싱싱해지려나?




**<가장 보통의 학교1>은 이후 윌라 오디오북에 출간하게 되었습니다.(윌라x브런치 오디오북 출판 프로젝트 수상). 출간하는 소설에서는 1권의 에피소드를 정리하여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2권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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