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
몸 말고 다른 팔 것. 글쎄, 만약 있었다면 부모를 팔았을까 형제를 팔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식을 팔았을까.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대기는 고요했다. 은빛 볕이 잔잔히 내리쬐고 저멀리에서 작은 새들이 동그란 목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이 고요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의도적으로 생겨난 게 아닌 나만의 독자적인 고요였다. 나는 천천히 골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십년 전 그날 난 사는 걸 택한 대신 다른 누군갈 죽였다. 뼈 아픈 죽음, 슬픔이었다. 난 그 사무치는 감정을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골반에 있던 손을 양옆으로 넓게 벌려 어깨 높이에 맞췄다. 좌우 대칭이 되도록, 중지 끝이 상상의 벽을 찌르는 것처럼 어깨와 팔, 손등을 수평으로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선 아주 섬세한 호흡이 필요했다.
"하."
이슬을 품은 새벽 흙내음이 폐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은 언제나 허공의 한 점이었다. 난 좌우로 뻗은 팔을 정수리 위로 합장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의 순간이었다. 팔과 허리가 나무 자라듯 늘어났다. 외발로 버티는 허벅지와 종아리는 더욱 굳건해져 내가 정말 노오란 숲 속의 상징적인 아름다운 고목이 된 느낌이었다. 난 왼쪽 코로 들이마신 숨을 정수리까지 끌어올렸다가 발끝까지 내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그 숨을 심장으로 불러와 오른쪽 코로 내보냈다. 재생. 몸안에 곪은 곳이 있다면 아무는 감각이 생경히 느껴졌다. 집중. 정화된 영혼이 혼탁해지면 나무가 흔들리는 법이었다. 나는 먼 산을 응시한 채 자세를 풀었다. 한 마리의 새하얀 학이 착지할 떄 날개를 접는 것처럼 우아하고 화려하게 팔을 내리고 회음부에 붙혔던 발을 매트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반대 발이었다.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 맨 위, 회음부 아래에 붙히고 방금과 똑같이 골반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난 숨쉬었다. 외풍이 목을 타고 뱃속 깊은 곳까지 갈 수 있게 복식호흡을 했다. 어둠 속 달빛과 같이 차갑고도 애잔한 바람이 꾹 다문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하."
호흡과 생각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잡생각은 늘 고요함 속에 켜켜히 박혀있었다. 나는 제이와 얽히고 설켜있었다. 무자비하고 깔끔한 관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게 불편했다. 다시 한번 호흡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지금 나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곤두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소년이 떠난 창밖은 검은 장막이 내려온 것처럼 캄캄했다. 그날 밤 제이는 검은 트렌치 코트를 입고 내 눈앞에 나타났다. 크리스탈 같은 헤드라이트 속에서 걸어나온 그는 예고없이 날 덮쳤다.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 입을 맞췄다. 혼자만의 사랑인 줄 알았어. 그래서 견딜 수 있었어. 그런데 리나, 너 마저······. 제이의 말에 나는 '어째서?', '언제부터?' 라는 의문을 삼켜야 했다. 우리의 관계는 언제 떠오를지 모를,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수면 위를 지배할 수 있는 얇은 종이였다. 난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종이라 생각한다면 찢어버리면 그만이잖아. 제이가 울먹이는 날 향해 굳건한 의지를 내비쳤다. 어림도 없을 거야. 물을 먹을대로 잔뜩 먹어 질겨진 그 종이를 어떻게···. 거기다 나에겐 그 종이를 찢을 힘따위 남아있지 않아. 거짓말. 난 그를 거칠게 밀어내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날 부둥켜 안은 그의 힘은 진심이었다. 정말······ 날 사랑하는 거야? 말도 안돼. 무언가 이상을 눈치챈 제이가 내 어깨를 잡고 날 쳐다보았다. 제발 그만 둬 그런 깊은 눈, 슬픈 눈. 더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한가지 사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난 카트리나. 사랑을 하지 않는 여자. 할 수 없는 여자. 창녀인걸. 십년 전, 피 말리는 인고의 시간 끝에 일상생활을 되찾은 나는 한동안 제이를 거부했다. 몸 팔아서 남는 게 남자면 곤란해. 한날 식당 여주인이 내게 말했다. 그녀는 식당 카운터에서 시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요. 내가 말했다. 장담하지 마.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건······, 그 뒷말은 기억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