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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Stone'. 고전 삽화 속 여자는 보석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복장은 중세시대의 귀족 부인 같았고 나이는 자녀를 여럿 둔 중년처럼 보였다. 아마 삽화 속 가장자리의 남자 세 명이 자식이 아닐까, 추측을 했다. 내가 삽화 바로 옆에 있는 글을 읽지 못하고 짐작만 하는 이유는 책이 전부 영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자 크기나 삽화 퀄리티, 책 상태를 보면 제이가 어릴 적에 읽은 소설 같았다. 검은 창살 대문이 있는 저택 서재에는 문스톤 외에도 많은 책이 책장에 가지런히 꼿혀있었다. 갈색의 여러 사전들. 상상동물백과사전과 식물대백과사전. 회색의 현대문학들. 검은색 표지의 외국 잡지와 과학 수업 교재였던 것 같은 붉은색 영어 원서······. 나는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짚어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리나! 하고 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윽한 종이 내음을 맡고 있던 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제이가 있는 곳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는 스무 살 봄, 퇴폐한 식당을 벗어나 교외의 정원이 넓고 삼층 복도가 구불구불 이어진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택은 외국으로 이민 간 제이의 사촌들이 별장으로 쓰던 곳이었다. 제이는 내게 책임과 보상을 약속했다. 실오라기 한 장 걸치지 않은 우리 사이였다. 그는 다른 손님들처럼 바람둥이가 아니었고 공상 허언증도 없었다. 나는 그 해 잿빛 하늘에서 떨어진 따스한 하얀 꽃을 잊지 못한다. 철 늦은 눈은 종이꽃처럼 하늘에서 흩날려 서서히 땅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때 뺨, 코끝, 눈가에 스친 눈의 냄새와 감촉은 아직도 생경했다. 우리는 큰 집을 관리해 줄 하우스 메이드를 찾았다. 침착해야하며 손재주가 좋아야 했다. 작은 일 하나까지 꼼꼼하게 해줄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애플리케이션에 채용공고를 내자마자 한 여성이 면접을 보러 왔다. 20십\대 중반이었고 패션모델 경력이 있었다. 전혀 다른 일이 될텐데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환영이예요. 그녀가 활기차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시외각인만큼 흉흉한 동네 분위기에 신변의 위협, 주거 침입 등 괴한 행위를 막아줄 체격 좋은 경호원도 뽑았다. 제이의 개인 수행비서였던 그는 앞으로 잘부탁한다는 내 말에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저택에서 제이는 차로 대학을 다녔고 나는 몸을 팔았다. 화대는 하룻밤에 500만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여자들이 몰려왔다. 제이는 나이도 생김새도 다 제각각인 그녀들을 모두 수용했다. 당연 손님들은 몰려왔고 종업원으로써 일자리를 구하러 오는 여자들도 많아졌다. 그때부터 허허벌판인 저택 주위로 편의점, 여성 패션, 카페 같은 상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종업원 일을 그만두고 근처에 빈티지 편집샵을 차리는 여자도 있었다. 제이와 나는 무엇이 됐든 그들을 격려했다. 제이는 인근 거주지역과 홍등가 전반의 치안을 지킬 시민무장단체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일명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골목을 걷다가, 술을 팔다가, 몸을 팔다가 가해져오는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았다. 서툴지만 인간미 있는 그들 조직은 머지않아 향락촌에 없어선 안될 존재로 자리매김 했다. 나, '카트리나'와의 잠자리로 조직 내 침묵의 계율을 깬 소년은 이후 어떠한 벌도 받지 않았다. 나 역시 공개적인 경고는켜녕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하우스 메이드는 평소처럼 12시에 일어나 브런치를 만들었고 경호원들은 항상 그랬듯 태평하게 정원을 돌아다녔다. 이상할 건 없었다. 난 이 세계에서 없어선 안될 존재였으니까. 다름아닌 '카트리나'였으니까. 단지 소년의 상대가 나였을 뿐. 난 여느 때처럼 종업원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들한테서 받은 선물을 풀어보기도 하며 화장대에 앉아 새 귀걸이를 걸어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금이 간 침묵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분명 소년도 나도 언제인가 무형의 댓가는 치루게 될 것이었다. 그게 당장일지 먼 미래가 될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