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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태양을 가린 벚나무가 은빛 섬광에 휩싸여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직 울 코트를 입어야 할만큼 쌀쌀했지만 햇볕은 강렬했다. 나는 그 생기 넘치는 꽃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 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되삼킬 순 없었다. 맹인 종업원을 곁에 둔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무심코 나오는 실수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퀭하지만 동양적인 매력이 다분한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침착하고 온화했다. 길게 찢어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걸로 보아 내 말실수가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새초롬하게 핀 벚잎 가까이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색조 네일을 하지 않은 마른 손이 꽃잎을 쓰다듬고 매만지기도 하며 촉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드러워요."
맹인 종업원이 발그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손끝의 섬세한 감각으로 꽃의 색과 질감, 모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는 벚나무 아래에서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드넓은 정원에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잔잔한 바람에 꽃과 향수의 과실향이 후욱 끼쳐오기도 했다. 오후 12시를 막 넘긴 저택 정원은 나와 맹인 종업원, 둘만의 공간 같았다.
"겨울을 물리치는 비가 거세게 퍼붓던 그날, 당신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릴까봐 마음을 졸였어요."
검은 창살이 박힌 정원 가장자리를 산책하던 중 맹인 종업원이 내게 말했다. 나는 시커먼 안개와 함께 타들어가는 장작불에 비친 검은 짐승 두 마리를 상기시켰다.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들었어?"
성난 숨결의 마찰. 현관에 핀 장미는 말할 수 없었고 유일하게 나와 소년의 일을 알고 있는 제이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 떨리던 시선은 어느새 질책에 가까운 눈빛으로 바뀌어 맹인 종업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맹인 종업원의 텅빈 눈동자가 날 찾아 움직였다.
"들렸어요."
얄쌍한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 소녀같은 입꼬리만 셀쭉 올라가 있는 얼굴은 의심할 여지없이 결백했다. 나는 잠시 벼루었던 칼날을 거두고 긴장한 눈매를 풀었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 저 대문이 열리고 낯선 인기척이 당신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왔어요."
맹인 종업원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서늘함에 얼어붙어 눈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1층의 골방 문이 닫히고 연중 꺼져있는 난로가 불타올랐죠."
"왜 지금까지 모른 척 한거야?"
아니길, 착각이기를 빌던 내가 물었다.
"아니길 바랬으니까요. 착각이길 빌었으니까요."
난 맹인 종업원의 말에 심장이 꿰뚫린 것같은 치명적인 자극을 느꼈다.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분수대로 향하는 길로를 거닐 차례였다.
"언제 확신한 거야."
난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와 낀 팔짱 넘어로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이의 빡친 모습을 누군가가 봤데요."
맹인 종업원의 입에서 '제이', 그의 이름이 나온 게 달갑지는 않았다. 나는 얼어붙은 제이의 뒷모습을 떠올리다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인가 제이가 말했어요. 이 저택도, '검은 옷을 입은 자들'도 다 후회중이라며."
맹인 종업원, 그녀는 제이와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매번 성공적인 밤을 보냈다. 맹인 종업원의 말에 에전에 없던 질투가 내 가슴 속에 일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기에 후회하고 화가 난 거예요."
나는 그만 맹인 종업원의 입을 내 입술로 막아버렸다. 그녀가 보는 희뿌연 세상. 촉감이 거친 것 연한 것, 모양이 각진 것 둥그스름한 것······. 너의 몽환적인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니?
나는 가끔 처음 맹인 종업원을 만난 날을 회상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식기를 찾아 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할 줄 모른다고 하는 걸. 맹인 종업원은 내게 먼저 귓속말로 섹스를 할 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가르쳐 달라고 했다. 느끼고, 흥분해서 만족시키는 법을. 그녀는 예민한 악기를 다루듯 날 매만져왔다. 그녀는 아주 감성적이고 집요했다. 우리는 서툴렀다. 그러나 강렬했다. 마치 교향곡을 연주하듯 리드미컬하기도 하며 숨을 참고 음표가 다시 시작되길 기다리기도 했다. 그날 난 그녀에게 무너졌다. 완벽한 패배였다. 관계가 끝나고 헐떡임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 맹인 종업원이 수줍게 말했다. 당신이 뿌린 향수가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나 또한 동성관계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로 하여금 여자의 아래가 벨벳처럼 부드럽고 말캉하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고마워. 내가 말했다. 뭐가요? 그녀의 물음에 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흐렸다. 친구가 되어줘서. 내가 한 대답은 과연 정답이었을까.
사창가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흐드러지게 핀 벛꽃은 달빛 아래에서 고유의 고혹함을 빛내고 있었다. 이날 낮, 맹인 종업원과 산책을 하며 말하지 않은 게 한가지 있었다. 셀 수 없는 벚잎의 향연. 나는 바람결에 떠밀려 온 가벼운 벚잎 무리가 분수의 차가운 수면 위를 뒤덮고 있는 절경을 맹인 종업원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해가 지고도 내 마음에 응어리져 남아 있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얘길 해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이 저택에서 그녀가 유일한 내 편이듯 그녀 역시 내가 유일한 친구였다. 고독할 거라고 예언한 메리의 경고가 옳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광활한 주위는 삭막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 나타난 맹인 종업원은 어릴 적 갖지 못한 동료, 잃어버린 유년시절의 보상 같았다. 우리는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어린 소녀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전날 밤의 손님, 화장이 진한 못생긴 종업원, 새로 심은 정원의 조경 등에 대해 꺄르르거리며 이야기 했다. 나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가냘픈 촛불 세 개가 촛대에 꼿혀 영롱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복도를 따라 맹인 종업원의 방으로 향했다.
"카트리나!"
만약 하우스 메이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제이가 맹인 종업원의 방에 있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착각이 아니냐며 하우스 메이드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입밖에 내지 못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이듯 살결을 쓸어내리는 하우스 메이드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만큼 번들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녀, 아니 지금 이 저택에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흥분상태란 걸 직감했다. 동시에 많은 눈들이 날 향해 있다는 것도 감지했다. 나는 맹인 종업원의 사랑스러운 몸짓을 기억했다. 볼품없이 삐쩍 마른 골반과 가슴. 여자는 그 우아한 몸선에 매료될테고 남자라면 정복욕을 자극하는 순수함에 흡수당할 것이었다. 난 오후 내내 품고 있던 마음의 응어리가 속절없이 녹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차가워지며 맥박이 원래의 제박자로 돌아갔다. 혼동해선 안되었다. 이것은 질투가 아닌 증오. 누구에 대한? 글쎄. 난 하우스 메이드가 볼 수 있도록 비소를 지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맹인 종업원의 방 쪽에서 둔탁한 음이 들려왔다. 절정에 다다른 흥분감이 하우스 메이드의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내 어깨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이 움찔거렸다. 적지 않은 충격에 빠진 나는 더이상 '카트리나'의 가면을 쓸 수 없어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