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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진강 Oct 25. 2024

여왕의 종업원 10

Catrina[카트리나]


10

 



우리는 눈꽃 결정체로 이루어진 얼음막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연약한 그 세계는 아름다우며 순결하고 결백했다.

종업원의 수명은 짧아.

고요 속의 전쟁, 그게 이 세계야.  

우리는 갑옷 없는 전사. 그 어떤 무기도 필요 없는 맨몸의 장병······.

밤벚꽃 사이로 눈을 부릅 뜬 올빼미가 울기 시작했다. 적보라빛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무리가 헤어나올 수 없는 너울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마셨다 뱉었다. 그들, 맹인 종업원과 제이 역시 이 흙내음에 모든 감각을 의존하고 있겠지. 질감, 매끈한 거랑 꺼끌한 것. 향기, 깊고 그윽한 것과 톡 쏘는 자극적인 것. 모든 것에는 차이가 있고 특별함이 있었다. 주홍빛 섹스에 심취해 교성을 내지르는 맹인 종업원에게 제이는 늘 자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의 사이가 단순 몸과 몸의 연결이 아님을 직감했다.

'날 자극하지 마.'

평생의 고독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무기가 되어줄 거야. 제아무리 맹인 종업원의 목덜미에서 내 체취를 찾으려 해도 소용없어. 일전에 우리가 나눈 성교의 쾌락은 너와 나였기에 교감할 수 있었던 독자적인 감정. 그 누구의 체온으로도 비슷한 경험은 할 수 없어. 그럼에도 네가 날 찾지 않는 이유, 내가 널 원하지 않는 이유. 지금의 우리는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서로 미친듯이 갈구하지만 찾을 수 없고 바래서도 안돼······. 이게 바로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정한 규칙의 한계. 과연 누가 먼저 이 룰을 깰까. 현실이 두려운 나? 애써 가시밭길을 선택한 너? 오늘 밤 상대는 날 위해 몇 번이나 큰돈을 쓴 네 대학 동창생이야. 난 지금부터 이 남자를 통해 널 비추어 보려 해.


나는 남자가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구름이 걷히고 드러난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자켓을 벗은 나는 남자의 밋밋한 가슴 가장자리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원단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와 내가 드러누운 곳은 방안의 넓은 침대가 아닌 정원 구석의  풀밭 위였다. 날 둘러싼 밤은 차갑고 검앴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달숲 요정의 비아냥거리는 놀림이 새어나와도 개의치 않고 하던 일에 집중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자연, 우주와도 같은 어둠, 무한한 가능성. 난 그것들에 푹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흥분했다.. 살결에 엉켜붙는 어린 잎이 간지러웠다. 흙과 바람의 향기로 신비로운 달숲은 새파랬다. 내 나신은 초록 풀밭 위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투박함 하나 없이 곡선으로 다져진 나의 몸이 활처럼 휘는 순간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였다. 기적.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곧 새벽이 몰아닥쳐 풀밭은 이슬의 안개로 자욱할 것이었다. 그 전에, 그 전에 끝내야 했다. 짐승처럼 헐떡이는 숨. 삽입의 순간은 아찔했지만 남자의 크기에 맞춰 이완된 질 내부가 오돌토돌하게 솟아올라 클래식한 템포에 맞춰 잔잔하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왈츠를 출 때에는 눈을 맞추며, 격정적으로 올라오는 팀파니의 파열음과 같은 순간에는 상대의 목에 팔을 감거나 두꺼운 허벅지를 손끝으로 짚었다..교교한 달빛이 '우리'를 위해 풀밭 위를 내려쬐는 것 같았다. 그 누가 '우리'를 욕할 까. 그 누가 '우리'를 조롱할 수 있을까. 시간이 없었다. 안개가 지면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풀벌레의 스륵거리는 소리가 검은 수풀에서 들려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교미의 살마찰음이 절정에 치닫았을 때 나는 상대의 허리를 양쪽 다리로 감싸 옭아맸다. 그의 허리짓에 머리, 몸이 들썩거렸다. 사정감에 눈물이 나왔다. 나는 실눈을 뜨고 땀에 젖은 남자의 은발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것이 자궁을 뚫을 듯 깊숙히 몸 안을 찔러왔다.

"악!"

내가 비명 질렀다. 밤부엉이가 두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어둠은 다시 짙어졌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체온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허리를 세워 일어나자 풀 위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남자의 얼굴 반쪽이 희미한 그림자에 가려져 보였다. 그의 눈매는 얼음 송곳처럼 예리했고 콧날은 패션 모델처럼 높았다. 연필로 선을 곡선을 그은 것 같은 입술 모양은 중성적이었다. 난 손을 뻗어 그의 얼굴 반쪽을 쓰다듬었다. 제이······.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 말았어야 했다.

"아쉽게 됐네. 난 제이가 아냐."

방금의 정사로 뜨거워져 있던 몸이 한순간 차가워지며 오한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당혹감과 충격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알아."

내가 대답했다. 내 세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깨부서진 조각의 파편은 심장을 꿰뚫고 내 몸 여기저기를 날카롭게 베었다.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났다. 순도높은 고통의 소리였다. 그것이 내 것임을 자각하는 건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내 주위의 수풀, 밤의 동물, 검은 나뭇가지는 온데간데 없고 황망한 잿빛 바람만이 남아 여린 피부를 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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