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일주일 전, 각 반의 남녀 1명씩 모범학생을 뽑아 졸업식 때 상을 주자는 교장 선생님의 제안으로 저희 반에서는 학생 투표로 모범학생을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남학생 대표부터 뽑기로 했습니다. 학생 추천을 받은 결과 총 5명의 남학생이 후보로 나왔습니다.
"자, 본인이 생각하기에 1년 동안 정말 우리 반에서 학업, 봉사, 인성, 수업 참여 등을 다 고려했을 때, 모범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를 뽑아주세요."
결과가 나왔습니다. 27명 중에 18표. 무려 66%의 득표율! 압도적인 표차로 재한이가 모범학생으로 뽑혔습니다.
"그래, 재한이면 인정!"
"맞아. 재한이는 수업 시간에도 적극적이고, 봉사도 많이 하고 모범학생이지."
단 하나의 이의 없이 반 아이들 모두가 재한이를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재한이는 원래부터 모범학생이었을까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전, 당시 4학년이었던 재한이는 반에서 매우 소극적인 학생이었습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해 박학다식하나, 그 유식함을 잘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친구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발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만사가 귀찮은 학생이었습니다. 숙제를 내줘도 제대로 해 오는 경우가 드물었고, 항상 선생님의 말에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심지어는 일기 몇 줄 적는 것이 힘들어서, 제 앞에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전 재한이가 충분히 잠재력이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그때 삶의 이유를 고민하며 슬럼프를 겪고 있어, 재한이는 물론 반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반 아이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죄책감으로 남아, 1년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4학년 담임 시절 반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이듬해 4학년 때의 아이들과 함께 5학년으로 올라갔습니다. 설사 다른 반이 되더라도, 옆에서 지켜보며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중 재한이는 제 관심 1호 학생이었습니다. 매번 연구실에서 재한이의 담임 선생님을 마주칠 때마다 재한이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재한이요? 음... 걔는 똑똑하긴 한데 너무 소극적이에요. 얼마 전에는 발표를 시켰더니, 안 할 거라고 계속 떼를 쓰는 거예요. 자신감 있게 해 보라고 했더니, 갑자기 우는 거예요.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제가 봤을 때, 걔는 좀 별로예요."
"아... 재한이는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아인데... 4학년 때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재한이의 상태는 전보다 심각해져 있었습니다. 가끔씩 복도에서 마주친 재한이의 모습을 보면,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습니다.
"재한아, 안녕. 오랜만이네."
"네.... (한숨)"
"왜 한숨을 쉬니? 요새 학교는 어때?"
"진짜 싫어요.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재한이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제 죄책감은 더욱더 커져만 갔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재한이는 6학년이 되었고, 이번에도 저는 기존 5학년 아이들과 같이 한 학년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운 좋게도 재한이와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라도 같은 반이 되어, 재한이를 케어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습니다.
예상대로 재한이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린 듯했습니다. 뭔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살아있으니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학기초 재한이를 따로 불렀습니다.
"재한아, 무슨 힘든 일 있어? 왜 항상 이렇게 소극적인 거니?"
"음... 솔직히 왜 제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는 거에 별 재미를 못 느끼겠어요."
"사는 게 재미가 없다니...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는 게 많은데!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재미도 있고, 공부를 하면서 성장하는 재미도 있고,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재미도 있고, 우리 삶 자체가 재미인걸!"
"선생님의 말에 공감이 잘 안 돼요. 학교, 학원도 부모님이 억지로 시켜서 가는 거고,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혼자 가만있는 것보다 재미없고, 공부도 너무 귀찮고 싫어요. 운동은 더더욱 싫고요. (당시 몸무게가 80kg가 넘었음)"
"음... 재한아. 딱 2달만 선생님 믿고 따라오면 안 되겠니? 2달 정도면 선생님이 아까 말한 성장의 즐거움, 인생을 사는 즐거움 충분히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네가 아직 성장의 즐거움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 거지, 정말 인생은 재미있어. 만약 2달 동안 네가 열심히 선생님의 말을 따랐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때는 선생님이 네가 수업시간에 뭘 하든지 간에 간섭 안 할게."
"네..."
그때부터 재한이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발표를 용기를 내어, 친구들 앞에서 손을 덜덜 떨면서 했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생활을 점검하는 데일리 리포트를 썼습니다.
특히 선생님, 반 친구들과 매일 저녁에 하는 온라인 자습 스터디인 줌터디는 1~2번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참여했습니다.
사실 저와 한 약속을 지키면서 중간에 몇 번 포기하려고도 했습니다.
"선생님, 매일 데일리 리포트 쓰고 줌터디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제가 변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어요.”
"선생님, 어차피 노력해도 전 안 될 거 같아요."
그럴 때마다 저는 재한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한아, 선생님이 봤을 때는 너는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숨은 다이아몬드 원석이야. 네가 조금만 더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을 거야. 지금 정말 잘하고 있어.”
몇 번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재한이는 끝까지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열심히 수업 시간에 참여했고, 데일리 리포트를 매일 썼고, 줌터디에도 매일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하면서, 재한이는 공부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약속한 2달이 지나고 나서도 재한이의 꾸준함은 계속되었습니다.
“선생님, 이상하게 처음에는 진짜 힘들었던 일들이 지금은 할만해요. 예전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임계점을 넘으니깐, 뭔가 한층 더 레벨업한 기분이에요.”
언제부터인가 저희 반에서 '모범생'하면 떠오르는 학생은 재한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재한이는 학기초의 소극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했습니다. 이제 반 아이들의 눈에 비친 재한이는 발표도 잘하고, 박학다식하고, 리더십도 있는 모범학생이었습니다.
모범학생으로 뽑힌 재한이를 축하하면서, 그동안 재한이가 한 꾸준한 노력들과 그 노력들로 인한 변화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말하면서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긍정적으로 변한 학생을 보고 선생님으로서 느끼는 보람과 뿌듯함이자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엥? 갑자기 선생님 왜 우시는 거야?"
아이들은 제가 왜 우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같이 눈물을 글썽이는 한 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재한이었습니다. 순간 재한이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재한아."
"네?"
"넌 이제 살만 좀 빼면 완벽하겠다.(장난)"
"와... 선생님 아까 칭찬하시자마자 바로 뼈 때리시네요... ㅎㅎ"
"너도 이제 알잖아. 꾸준히 하면서, 딱 임계점만 돌파하면 금방 변화할 수 있다는 거."
"그건 그렇죠. ㅎㅎ"
"그런 의미로 졸업할 때까지 살 한 번 빼보자. 어때?"
"넵!"
몇 십년 전, 하버드대학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독특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전교생에게 인지 능력 평가 시험을 치르게 한 뒤, 상위 20%의 영재 학생 목록을 교사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영재들이 당장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더라도 학년이 끝날 때쯤이면 ‘비범한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말이죠.
1년 뒤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재라고 평가받은 학생의 점수가 나머지 학생들의 점수보다 더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 격차는 더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처음에 영재로 분류된 학생들은 실제로 높은 점수를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로젠탈은 순전히 무작위로 20퍼센트의 학생을 선발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실험은 교사가 특정 학생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고자 고안한 실험이었습니다.
교사가 어떤 학생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믿을 경우, 교사는 그 학생이 높은 학업 성취와 성장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 기대는 교사의 따뜻한 격려와 진심 어린 관심으로 나타나고, 아이는 교사의 세심한 피드백을 받으며 본연의 잠재력을 이끌어내어, 더욱더 발전하고 성장하죠. 이를 로젠탈 효과라고 합니다.
로젠탈 효과의 핵심은 상대방에 대한 진실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진심으로 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부하 직원에게 신뢰, 관심, 기대 그리고 격려를 제공하게 됩니다. 직장 상사의 진심 어린 눈빛과 행동, 구체적인 칭찬을 경험하면서 부하 직원은 그 기대에 부흥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마치 재한이의 사례처럼 말이죠.
여러분들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혹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계시진 않은가요? 만약 그렇다면 오늘부터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따뜻한 칭찬 한마디 해주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