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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Jul 26. 2021

사람을 잊는 법

마늘단편- 맛없는 맛집 소설






"선생님, 그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 사람은 이미 나를 잊은 것 같은데 나는 이제 어쩌죠?"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무척 놀랐다. 왜냐면 나는 지금까지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다. 그런 혼자만의 망상에 몇 개월 빠져있었고, 그 망상을 깨운 그녀의 고백에 나는 앞에 놓여 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호이리게에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와인이 가득 담겨 있던 잔의 와인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거의 반 쿼터 가까운 와인을 들이키고 혀가 고부라지기 시작하던 말던 그녀는 잠시 흐느껴 운 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와 내가 알게 된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학생과 제자 사이로 만나기 시작,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다가 몇 개월 전부터 둘이 만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고 그 시간도 자꾸 늘어갔다. 전반적인 예술,  그중 특히 미술에 열심히였던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예술가인 척하는 나를 잘 따랐고 그런 우리는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건 꽤 잘 맞았다. 날이 좋은 날은 도나우강어귀에 앉아서 리슬링 와인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으며, 날이 흐린 날은 레오폴드 뮤지엄의 입구 쪽 아치 바닥에 드러눕듯 앉아서 하이랜드파크 같은 위스키를 들이부었다. 늘 고주망태가 되어도 서로 간에 성적인 호기심이 덜했는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몇 개월간 우리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선생님,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면 그를 잊을 수 있을까요? 그 이와 나는 만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나와 몇 번 여행도 가고 잠자리도 같이 한 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졌어요. 전화도 잘 안 받고, 만나도 퉁명스럽고, 날 귀찮아하는 태도로 말이에요.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자꾸 연락하게 돼요. 어쩌죠. 저 어떻게 해요?"

나는 이 상황에 대해, 그녀에 대해, 나에 대해 모든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조금 전 입으로 들어간 와인 안의 알코올이 슬슬 내 입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아, 그러게 말이야. 사랑이란 말이지. 아, 아,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구. 진실된 사랑이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잊어... 아, 질문이 그게 아니었지. 그렇지. 잊기 힘들겠지. 누구나 잊기 힘들꺼라구."

알코올의 기운을 빌어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려 했지만 계속 횡설수설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 횡설수설하다가는 뭔가 능력 없어 보이는 어른처럼 보일까 봐 잠시 집중을 한 뒤,

"내 경우는 말이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 무서울 때 아,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 사람의 가장 추한 모습을 상상해. 이를테면 코털이 삐져나왔다라던가, 눈에 눈곱이 끼어 있는 모습이라던가, 혹은 다리를 떨거나, 내가 싫어하는 팔자걸음을 걷는다던가. 뭐 그런 상상을 아주 집중해서 하면 길게는 아니다 하더라도 잠시는 잊게 되더라고."

"아, 정말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에요. 저도 그런 상상을 해봤고 잠시나마 그를 잊을 수 있었는데 그 찰나 같은 잠시 외에는 다시 그의 채취, 목소리, 사슴 같은 눈망울, 우아하게 걷는 발걸음 등이 연쇄적으로 떠올라서 더 잊기가 힘들어요. 어쩌죠?"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와인 한 잔을 마시고는 알코올의 힘을 빌렸다.

"그러면 다시 또 상상하는 거야. 계속 상상하는 거지. 그 놈팡이의 안 좋은 모습을. 우리는 예술을 하잖아. 상상력이 풍부하다구. 계속, 계속, 그 자식의 나쁜 점만 떠올리고 생각하고 속으로 욕하는 거야. 그러면서 주변의 괜찮은 남자를 찾아서 서둘러 사랑을 하는 거지."

"아, 너무 어려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렇게 안 좋은 것만 계속 상상할 수 있을지.."

그녀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녀의 눈에 보인 눈곱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콧물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고, 번쩍 하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경찰서 안이었다. 뺨을 맞은 아픔보다 숙취가 지독하게 심했고 유치장 밖의 경찰들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쉽게 잊었지만 그녀는 나도, 그 염병할 자식도 잊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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