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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Aug 17. 2021

누구나 절망적인 순간에 연락한다.

마늘단편- 맛없는 맛집 소설






"당신, 나를 사랑했었었나요? 진심으로 사랑했었었나요?"

술이 확 깼다. 무심코 받은 전화였다. 오래간만에 파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와인바인 monsieurhenri에서 마스터가 추천해 준 내추럴 와인을 기분 좋게 마시고 있을 때였다. 달착지근하지만 피니시가 이상하리만큼 시큼해서 인상적이었던 내추럴 와인. (라벨이 뭐였더라?) 그 와인을 옆에 앉아있던 낯선 여성에게 한 잔 권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 아, 웬일이야."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보통 '관계가 끊어진 이성과는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끊는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다'라는 것이 내가 그간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래서 헤어진 대부분의 이성은 스마트폰 전화 목록에 남아있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많이 취하지는 않았지만 전화가 걸려왔을 때 스마트폰에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보란 듯이 표시가 되어있었다. 나는 무척 오래간만인 그녀의 전화를 희한하리라만큼 거부감 없이 받았다.

"저 기억해요? 이봐요, 저 누군지 아냐구요."

"아, 아, 그럼. 그럼. 이 시간에 웬일이야. 하하"

무척 어색할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리라 할 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우리가 미친 듯이, 그리고 절실하게 사랑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대답해봐요. 당신, 나를 사랑했었었나요? 진심으로 사랑했었었나요?

"그럼, 사랑했었어. 진심으로 사랑했었어. 당신을 사랑해서 새겼던 문신 기억나지 않아? 사실 나는 문신 따위는 내 평생 새기고 싶지 않았다구. 우리 부모님이, 아니, 그래, 어차피 사라질 내 육신, 살아 있을 때 최대한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 정말 문신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구.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유니콘 문신이 좋다면서. 그리고 크리스마스 루돌프처럼 코가 빨간 유니콘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알잖아. 내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오른쪽 손 등에 큰 빨간 코 유니콘 문신을 한 거. 그 문신 때문에 아직도 오른손에는 장갑을 끼고 다닌다구. 여름에 얼마나 더운 줄 아냐구."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래간만에 듣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따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채취, 그리고 얼굴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맞아요. 맞아요. 그랬었죠.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그 정도로만 사랑했던 건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말보로 라이트 담배를 재떨이 앞에 놓고 천천히 깊게 빨아서 폐까지 넣은 뒤 재가 날리지 않게 살살 내뱉었다. 그리고 난 뒤 재를 떨고 마스터와 옆자리의 여성에게 한 손으로 핸드폰을 가리키며 눈짓을 하고는 monsieurhenri 밖으로 나왔다. 

"거 참, 이봐. 그거 기억 안 나? 당신이 나 런던에 출장 와 있는데 갑자기 밤에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울기 시작한 거. 아무 이유도 없이 울기만 해서, 내가 어찌나 걱정이 되었던지. 바로 비행기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거. 당신 집 문을 열자마자 당신은 내 품에 안기며 왜 왔냐며 다시 펑펑 울었잖아. 덕분에 나 회사에서 승진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구."

그녀는 기분이 좋아진 듯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래요. 그때 당신,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나도 행복했다구요. 너무 행복해서 그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그런 당신은 날 진심으로 사랑했나요? 그랬나요?"

"맞아, 그랬었어. 그때는 정말 그랬다구. 당신이 가지고 싶다던 에르메스 악어가죽 버킨부터 샤넬의 리미티드 제품들까지 당신이 원하는 건 다 사준 것 같다구. 예나 지금이나 내 연봉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꽤 되는 편인데 그 덕에 나는 지금까지 빈털터리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구.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내가 잘못했다거나 불행했다거나 생각하지 않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익숙한 적막이었다. 이런 소리가 있다면 녹음해 두었다가 가끔 긴장하고 싶을 때 들으면 좋겠다 생각할 정도의 소리, 아니 적막.

"사랑이 어떻게 그렇죠? 사랑했는데 어떻게 사랑 안 할 수 있죠? 맞죠? 우리는 사랑했지만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사랑은 그런 건가요?"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또한 무척 익숙했다. 익숙한 패턴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미안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녀에게.

"미안해."

"아, 아니에요. 딱 10년 만이죠.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오늘 당신 생일이잖아요. 나만큼 당신을 잘 아는 사람 없을 거예요. 오늘 동네의 단골 바에서 한 잔 하고 있었죠? 부드러운 블랜드 위스키를 한 잔, 그리고 몰트 위스키를 2~3잔 정도 마셨겠죠. 마스터는 당신의 생일인 걸 알고 있지만 축하해주지 않죠.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아마 몰트 위스키 다음에 달착지근한 코냑 한 잔 정도를 서비스할 거예요. 오늘 같은 날 당신은 마스터에게 부탁해 엘라의 misty를 한 곡 틀어달라고 했을 거예요. 그렇죠? 잘 알아요. 변함없다구요. 당신은. 호호."

맞다. 그녀는 그녀가 전화하기 바로 그 전 상황까지 맞췄다. 놀랍지는 않았다. 우리는 사랑했었으니까.

"생일 축하해요. 다시는 연락할 일 없을 거예요. 그냥 궁금했어요. 당신이 날 진심으로 사랑했었는지."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전화는 끊겼다. 나의 스마트폰에는 10년 전 그녀의 전화번호와 그녀의 이름이 잠시 점멸하다가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 서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잠시 든 뒤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은 뒤 뱉어냈다.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 잠시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금 전 마스터가 서비스로 준비해 준 꼬냑이 생각났고 아직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를 손으로 비벼 끈 뒤에 monsieurhenri 안으로 들어왔다. 나오기 전보다는 두세 명이 더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마스터는 새로 온 손님들의 자리를 준비해주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perfect day에 심취해 있는 듯하다. lou reed의 곡.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앞에 있는 꼬냑을 한 번에 들이켰다. 사랑했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했었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녀가 잊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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