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술실이란 극장 (Operative theatre) 10 화
요즘은 기억력이 많이 감퇴되어 오래된 일들이 희미하게 생각나고 최근의 일도 깜박거려서 항상 어딘가에 메모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실수를 하게 될까 두려움이 든다. 그러나 유독 오래되었어도 생생한 일들, 얼굴들은 아주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이나 친구들의 얼굴들이다.
노인성 치매가 왔을 때 최근 일부터 잊어버리고 어릴 때 기억이 가장 오랜동안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을 본인의 아버지로 착각하는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세상을 뜨시기 전까지 정신이 명료하셨기에 내가 치매에 걸릴 확률은 좀 낮지 않을까 기대를 해 보기는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그때 당시 나는 대학 병원의 전임의(fellowship) 과정에 있었다. 전임의 과정이란 전공의가 끝난 후 전공 분야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의사들이 거치는 과정인데 요즘은 대부분 이 과정도 전공의만큼 필수 과정으로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전임의 과정을 밟는 의사가 드물었다.
그런 만큼 전공의와 전임의가 하는 일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아 전공의가 하는 업무를 나누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분과별로 전임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전 과정을 돌아가며 받아야 하였고 나는 그 당시 소아 병원에 전임의를 하고 있었다. 전임의 초기이고 30대 초반이었던 때라 열정과 긴장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었던 것 같다. 소아 병원은 생후 며칠의 아기부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15세 넘어선 아이들까지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인과 아이들이 분리되어 있기에 병원 전체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보니 병원 시스템이나 사용하는 도구들도 다 작고 귀여웠다. 내가 그 당시 들고 다니던 청진기는 금색과 파란색으로 구성된 예쁜 청진기였다. 매일 아기들과 아이들만 만나다 보니 소아 병원의 전임의 3개월 과정이 끝나고 본원의 수술실에 들어가던 첫날 수술대 위의 어른들을 보니 걸리버 여행기의 대인국 사람들을 본 것처럼 얼마나 커다랗게 느껴지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느낌에 웃음이 난다.
소아 병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수술은 흉부외과 수술이었다. 아침 6시 반부터 환아가 도착하여 7시 정도부터 입실하게 되는 데 보통 아기들의 입실은 이동카를 통해 들어가기보다는 담당 마취과 전공의나 전임의가 안고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부분 선천성 심장 기형 수술이었기에 그 조그마한 몸에 여러 가지 관을 삽입해야 했고 다양한 약제들을 사용해야 했다. 아기들이 어찌나 작던지 때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중심정맥관이 삽입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당시 소아 병원의 마취과 주임 과장님께서는 연세가 아마 지금의 나 정도였을까 아니면 더 젊으셨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우리가 실패하는 삽입을 한 번에 잡아주시곤 하셨는데 정년이 넘으신 지금도 다른 대학병원에서 병원장으로 왕성하게 일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마취 유도 후 심장 수술하는 동안 심장은 약제와 저온으로 멈추게 만들고, 심장 대신 다른 장기의 혈액순환을 담당하는 심폐 우회로의 펌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수술이 끝난 후에는 다시 심장의 온도를 올리고 심폐 우회로의 펌프의 속도를 줄여 심장의 기능을 보고 아기의 심장이 잘 뛰는 경우 심폐 우회로와 아기를 분리하게 된다.
대학병원이다 보니 심각한 심장 질환을 가진 환아들이 많았고 수술 후에도 중환자실 가기 전까지 각종 심장의 기능에 도움이 되는 약제들을 아기에게 투여하다 보면 그 조그만 아기의 몸과 연결된 연결줄 들만 수십 개는 되었던 것 같다.
선천성 심장 기형이란 질환은 여러 가지 증후군을 가진 환자들이 앓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환아들의 경우 심장병뿐 아니라 얼굴과 기도의 기형이나 기타 전신마취 시 고려해야 할 문제점들을 가진 경우가 있어 마취과 의사는 수술 전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병실을 방문하게 된다.
그날은 전공의의 일이 많은 것 같아 마취 전 환자의 상태를 알기 위해 전공의 대신 내가 5살 된 환아를 만나기 위해 병실을 방문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와 책을 읽고 있다가 일어났다. 그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네에서 같이 뛰어다니며 놀았고 3학년 때는 동네 총각한테 같이 과외도 받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과는 달랐으나 같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 추던 디스코라는 춤을 잘 추어 특별히 우리 집에 초빙하여 친구 여러 명이 같이 그녀를 따라 춤을 배우던 기억도 났다. 그녀 또한 나를 알아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둘 다 대학 졸업하고는 연락도 끊긴 지 오래였고 서로 결혼하고 나서는 아주 친하던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나에게 그녀가 나의 친구였다는 단어를 쓰기에도 서먹한 관계였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어렸을 때 그대로인지라 뭐라고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고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아는 척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남편도 의사라고 했고 그녀도 약대를 나왔으니 약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나 아이 양육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친구 아이의 정확한 증후군은 기억나지 않지만 약간은 서양 아이처럼 코가 뾰족하고 턱은 작고 특이한 얼굴이기는 하였으나 마취과 의사들이 기관 내 삽관이 어려워 두려워하는 증후군인 삐에레-로빈 증후군(Pierre-Robbin syndrome)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친구들과 그 자녀들을 만나면 아이가 귀엽다는 둥 똑똑하게 생겼다는 둥 실제로 느끼지 않은 경우에도 여러 가지 칭찬을 예의상 늘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원래 성격이 그러하지 못하고 그 친구와 아이에게는 예의상의 말이나 위로와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특별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내일 수술실에서 보자는 말만 하고 병실을 나온 것 같다.
수술 당일 수술실 입구에 다른 날보다 일찍 나와 친구의 아이를 기다렸다. 얼마 후 친구와 친구의 남편 품에 안긴 아이가 도착했다. 아이는 5살이다 보니 다른 어린 아기들보다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힘들어하여 할 수 없이 소량의 수면제를 투여하고 수술실로 옮겨야만 했다.
아이가 큰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에게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 수술이 어떤 수술이며 결과가 어떨지 알 수가 없는 수술이었기에 난 그냥 이따 보자는 말만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수술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후 친구의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별로 좋지 않았기에 나의 기억이 이리 희미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친구가 아이의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서며 흐느끼던 어깨다.
수술 후 병문안을 갔었는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 내가 담당했던 마취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고 계속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아니었기에 새삼 그녀의 힘든 상황에 내가 불쑥 나서기도 어색해서였을 것이다. 혹은, 젊고 한참 바빴던 시절이라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특별한 기억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이 나이에 그런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면 난 무얼 할까? 난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먼저 잡아주고 내 품에 안아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작품 중에 ‘성취’에 나오는 두 사람처럼 그녀를 온전히 안아주고 싶다. 이 명화는 클림트의 장식성이 강해진 후반기 작품 중의 하나이다. 두 사람의 강한 포옹 주변으로 장식적인 수많은 나뭇가지들은 세상사의 어려움과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강한 포옹 속에 두 사람은 세상사를 잊은 듯하다. 잠시라도 그녀에게 휴식과 안식을 주고 싶다.
제목: Fulfilment (성취, 구스타브 클림트 작품, 1905-1909, 오스트리아 응용 미술관 소장)
벨기에 사업가의 저택에 모자이크 장식벽화로 제작되었던 작품으로 클림트의 고전주의 화풍의 영향으로 신화적인 요소가 많았던 이전 작품과 달리 장식성이 강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 풍 의상은 크림트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잔틴 취향을 나타낸다. 출처: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