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고 있어. 길을 터 나가듯이 개나리, 목련, 벚꽃이 차례로 꽃 피우던 봄은 이제 영영 사라지고 있는 걸까.
너는 어떠니? 길을 걷다가 혹시 새 잎이 돋아난 걸 보았니? 회양목에 작은 꽃들이 달린 것은? 그 꽃에 꿀벌들이 옹기종기 모여 꿀을 빠는 모습은? 민들레처럼 작은 들풀들의 꽃도 혹시 만났을까? 네가 그 사이 어떤 봄을 만났을지 궁금해. 새 잎이 나거나 꽃이 필 때마다 소리가 난다면 세상은 정말 시끄러울 거야. 하지만 알다시피 식물들은 너무나 고요하지. 그러니 귀를 쫑긋 세워도 별 소용이 없단다. 봄은 내가 뭘 하든지, 안 하든지 다가오고 여물고 다시 저물겠지. 고요한 봄을 제대로 만나려면 눈을 크게 뜨고 다니며 자세히 살펴보는 수밖에.
겨울은 너에게 어떤 색깔이었니? 어떤 친구는 눈 오는 날을 떠올리며 온통 새하얗다고 하더구나. 눈이 내리지 않았거나 쌓인 눈이 다 녹아버린 겨울은? 시멘트의 회색이나 아스팔트의 검은색? 창백하고 어둡거나 차분히 가라앉은 보랏빛 느낌의 색들도 떠올라. 그런 세상에 샛노란 꽃망울이 하나 피어난 걸 상상해 봐. 눈에 확 띄겠지? 그것 때문일까. 초록 잎들이 마구 돋아나기 전에 얼굴을 내미는 꽃 중에 유난히 노란색이 많더구나.(무조건 노란색만 있는 건 아니야.) 노란 민들레, 산수유 꽃과 생강나무 꽃, 개나리까지 말이야. 노란 꽃의 은은한 향연이 끝날 즈음 드레스처럼 환한 탐스러운 목련을 만날 수 있고 그 후에는 벚꽃이 화려하게 팡팡 피어날 거야. 그 꽃들이 지면 초록 잎들과 어우러진 화려한 철쭉의 시간이 되겠지.
노란 꽃 중에 가로수로 단연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가 개나리야. 식물 이름 중에 '개'자가 붙은 게 또 뭐가 있을까? 개복숭아는 복숭아와 어딘가 비슷한데 그 열매가 훨씬 작고 못생겼대. 요즘 몸에 좋다 해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기에 붙은 '개'는 진짜가 아니라거나 원래 그것보다는 좀 덜하다는 의미야. 개나리의 '개'자도 비슷한 뜻이겠지. 나리이기는 한데 좀 작고 못났달까. 나리꽃은 훨씬 크고 색도 다양하고 화려해. 그에 비하면 개나리꽃은 새끼 손가락한 마디 정도로 작지. 여러 개가 한데 뭉쳐 피어있으니 화려하고 예쁘지만 한 송이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눈에 띄기 어려웠을지도 몰라.
개나리는 보통 꺾꽂이(삽목)로 번식해. 꽃은 한 그루에도 수십 개씩 달리지만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거든. 이 두 꽃의 꽃가루가 만나야만 열매가 맺는 거야. 그 확률이 너무 낮아서 개나리의 열매를 만나기는 쉽지 않아. 그래서 줄기를 잘라다가 땅에 꽂아 번식시키게 되었지. 우리나라 지천에 널린 개나리는 대부분 꺾꽂이로 번식한 것이라 유전적 특징이 동일하지. 개나리에 치명적인 병이라도 도는 날엔 개나리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겠어. 개나리는 우리나라 특산종이기도 하니까 전 세계에서 개나리가 멸종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 기대라고 해. 봄을 기대하고 따뜻한 계절을 희망하는 마음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개나리가 환하게 꽃 피면 정말 봄이 온 것 같으니까. 생울타리와 가로수로 심긴 개나리에 노란 꽃이 줄줄이 달린 모습을 얼른 보고 싶구나! 그 봄의 문을 열어주는 소중하고 예쁜 꽃에 '개'자가 붙어서 좀 유감이야. 내가 개나리였다면 '가짜 나리'라는 뜻의 개나리 말고 좀 더 예쁜 이름을 갖고 싶었을 것 같거든. 개나리의 영어 이름은 golden bell이야. 말 그대로 황금종. 네 개의 꽃잎은 자세히 보면 갈라지지 않은 통꽃이라 작은 종모양 같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소망을 품는다면 꺾꽂이가 아니라 고운 열매로 자손을 번식시키고 싶을 거야. 식물들에게도 번식과 생존은 가장 중요한 문제거든. 이름-정체성과 종족번식 문제는 곤충, 동물, 우리 인간들에게도 참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잖아. 개나리가 품은 희망과 기대가 무엇이든, 개나리를 보며 우리 모두가 좀 더 나은 무언가를 희망하고 기대를 품으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 개나리를 만나게 된다면 너의 희망과 기대는 무엇일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