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꽃들이 우르르 피어났던 초 봄을 기억하지? 이 꽃들이 다 지고 나면 세상이 휑해지면 어쩌나 괜히 마음을 졸였었잖아. 내 걱정은 기우였나 봐. 다행히 꽃들은 계속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중이야. 봄꽃의 뒤를 여름꽃이 바짝 쫓아오고 있네.
벌써 여름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고? 5월 6일은 입하였잖아. 立 설 립에, 夏 여름 하. 여름이 들어선다, 시작한다는 뜻이지. 입하는 24 절기의 일곱 번째 절기야. 태양이 1년 동안 가는 길을 24개로 쪼개고 하나씩 이름을 붙인 것을 24 절기라고 해. 음력으로 세는 명절과 헷갈려서 절기를 음력이라 생각하기 쉬워. 하지만 절기는 농사를 짓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나눈 것이거든. 농사는 식물을 키워내는 일이고 그 일에는 당연히 달-음력이 아니라 태양-양력의 힘이 중요해지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절기가 음력을 따르는지 양력을 따르는지 헷갈리지 않을 거야.
입하 즈음에 꼭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어. 오늘 이야기할 이팝나무가 바로 그 나무야. 입하에 꽃이 잔뜩 피어나니까 입하나무, 입하나무가 세월이 흘러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대. 또 하나는 옛날에 쌀밥을 뜻하는 '이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야. 조선 시대에는 이 씨 성을 가진 왕족들만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지? 지금에야 흰쌀밥이 흔하지만 그 옛날에는 쌀이 부족하니 가난한 백성들은 보리나 조 같은 잡곡을 잔뜩 넣은 밥을 먹었어. 가난한 백성들의 밥그릇에 담긴 밥은 아마 누르스름하기도 하고 거무티티하기도 했겠지. 이팝나무 꽃은 길쭉하고 가늘지만 주렁주렁 잔뜩 피어나 커다란 덩어리처럼 보여. 가느다란 꽃들이 어찌나 많이 한꺼번에 피어나는지 뭉게뭉게 구름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그 하얀 꽃뭉치를 보고 흰쌀밥을 떠올린 거야.
도시에서는 농사짓는 모습을 쉽게 보기 어렵지. 이 즈음에 논, 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워. 입하에는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시작해. 작게 자란 벼를 논에 옮겨 심으면서 본격적으로 논농사가 시작되지. 텃밭에도 거름을 넣고 모종을 심어서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키우기 시작하지. 이 시기는 농부들이 가장 바쁘기도 하고 가장 배고픈 시기이기도 해. 작년에 수확한 쌀, 고구마는 다 먹어가지. 쌀을 대신할 만한 보리나 감자는 여물지 않았거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 밭에서 일은 해야 하는데 먹을 것은 다 떨어져 갔던 거야. 어찌나 먹을 것이 모자라고 배고팠는지 5, 6월을 일컫어 보릿고개라고 부르기도 했어. 넘기 힘든 고개, 이 고개만 넘으면 보리를 수확해 먹을 수 있건만 그 고개를 넘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던 거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은 조상들이 겪은 굶주림과 고통은 말도 못 할 정도였대.
몹시 배고프던 그 시절, 눈을 들어 주변을 보니 나무에 하얀 꽃이 뭉터기로 달려있어. 얼마나 밥 생각이 간절했던지 그 나무에 이밥나무, 이팝나무라 이름을 붙였던 거야. 이팝나무만이 아니야. 꽃 중앙이 노란빛을 띠는 조팝나무는 조를 섞은 밥인 조팝나무에서, 진한 자줏빛 작은 꽃들을 피우는 박태기나무는 밥풀때기에서 유래되었다지? 이팝나무의 영어 이름은 fringe tree야. fringe는 앞머리, 술 장식을 뜻해. 조팝나무는 신부의 화관을 뜻하는 bridal wreath이고. 이팝나무의 꽃을 하나씩 살펴보면 독특하고 참 예쁘거든. 길쭉한 꽃잎이 한 데 모여 피어나니 화려하고 풍성하지. 하지만 굶주림에 시달린 우리 조상들의 눈에는 그 아름다움 보다 밥 생각이 먼저 났던 것이겠지.
이팝나무는 쌀과도 진짜 관련이 있어. 모내기를 할 즈음에 꽃이 피다 보니까 예로부터 한 해 벼농사를 점치는 기상목 역할을 해 왔거든. 봄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야. 봄에 가물면 아무래도 싹도 영 시원찮게 자라고 나중에 수확량도 적어지지. 반대로 비가 충분히 와서 땅에 물기가 넉넉하면 뭘 심어도 쑥쑥 잘 자라게 되는 거야. 그런 조건이라면 이팝나무도 건강히 잎을 내고 꽃을 많이 피우겠지? 그래서 농부들은 이팝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면 풍년이 들 것이라 생각했고 이팝나무가 꽃을 덜 피우면 흉년이 들 거라 여겼던 것이지.
너는 혹시 나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니? 꽃나무를 보면 아름답다, 열매가 열린 나무를 보면 맛있겠다? 나를 포함해서 요즘 사람들에게 나무 한 그루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경우는 드물어. 옛 조상들은 이팝나무 꽃을 보며 보릿고개를 부디 잘 넘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한 해 농사가 잘 되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를 소망했지. 지금은 옛날처럼 굶주린 시절이 아니라고? 맞아,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나무에 기대어 소망하고 기대하는 마음도 사라져 버렸지. 다시 배고픈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철마다 피는 나무를 보며 한 해 살이를 기대하고 무언가를 소망하는 마음만은 되찾고 싶구나. 뭐든 넘쳐나는 세상에서 딱 하나 모자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마음, 나무와 함께 했던 마음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