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아빠의 주말 외출이 잦아졌다. 할머니와 셋이 보내는 주말이 더 익숙해질 때 즈음. 아빠는 처음 보는 여성분을 데려와 친구라고 소개했다. 요즘 말로 여자 사람 친구 정도로. 하지만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였다.아빠의 애인이 생긴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빠가 없는 주말을 보내면서부터 조금씩 예상해온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당황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중요한 건 나에게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빠는 늘 무서운 사람이었고, 만약 속마음을 말하면 크게 혼이 나거나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 한편에는 아빠를 위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당시는 엄마가 떠난 것도 모자라 아빠의 회사 사정까지 힘들어진 시기였다. 아빠가 다니던 작은 회사가 부도가 났고, 사장이 해외로 도주해버렸다. 그날부로 아빠를 포함하여 보증을 섰던 직원들이 줄줄이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 집도 경매에 넘어갔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노란 딱지가 우리 집에도 붙었다. 아끼던 피아노를 팔고 다시는 칠 수 없게 된 것도 그때였다(지금도 아빠는 술을 드시면 가끔씩 피아노 얘기를 하면서 미안해하신다). 곧 우리 네 식구는 할머니가 혼자 사시던 방 한 개짜리 작은 집으로 들어가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엄마가 떠났을 때보다 더 길고 짙은 아빠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아빠는 다시 일어섰다. 남은 직원들끼리 힘을 모아 회사를 재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아빠는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정과 직장이 동시에 무너져버린 시기라니... 어른이 된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도 마음이 버겁다.
이런 시기에 아빠의 지친 마음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그분이었다. 나는 더더욱 그분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아빠의 애인은 책을 많이 읽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다소 지적인 사람이었다. 중학생이던 나에게 '미션'이라는 명작을 소개해준 것도 그분이었다. 그분이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엄마와 아빠보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스칠 때마다 조금은 슬퍼지기도 했다.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빠는 왜 엄마에겐 저렇게 다정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에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엄마를 만들어주고픈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내가 무언가 배우기를 바랐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 끓이는 순서, 타지 않게 감자 볶는 법, 설거지하고 나서 싱크대 주변까지 마른행주로 닦는 것 등등. 그때부터 나를 걱정했던 것이다. 혹시 어디 가서 '엄마가 없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서. 그렇게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아빠의 생각은 확고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