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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언니 Nov 15. 2019

2월이 시린 이유

찢어진 가족이 되어 버렸다

  



   2003년 2월. 초등학교 졸업식을 이틀 앞둔 겨울날, 부모님은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 엄마가 집을 떠났다.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낭독하기로 했지만, 나조차도 그 사실을 잊을 만큼 우리 집은 쑥대밭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평소에도 자주 다투었다. 다툼이 심한 날이면 나에게 몇천 원을 쥐어주고는, 동생과 간식을 사 먹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오라고 했다.


   부모님은 알았을까?  나와 동생은 밖에 있으면서도 늘 불안에 떨고 있었다는 걸. 보고 있지 않아도 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걸. 부모의 다툼만큼 어린 마음을 힘들게 한 것도 없었다는 걸...


   엄마가 떠나기 전날도 두 분이서 꽤 심하게 다투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뒤, 훌쩍이던 엄마는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 떠날 거야"

   

    그리고  말이 실화가 되어버렸다.

     

     

     


     

   '이별 직후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마치 꿈에서 벌어진 일인 듯 고통이 곧바로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법. 나 또한 그랬다. 그저 엄마가 외갓집에 갔거나 여행을 떠난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내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얼마간은 그대로 움켜쥐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괴롭힌 것은 상실감이 아닌 불안함이었다. 그날 벌어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문이었다.

   "잠시 뉴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오전 10시경, 대구 중앙로역에서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50대 김 모 씨가... "

   '아뿔싸...'

   공교롭게도 엄마의 고향은 대구였다. 그 어떤 행방도 알 수 없던 상황이기에 그 사실이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엄만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혹시 고향으로 가서 저 때 저 장소에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선 TV에 나오는 희생자 명단만 하염없이 찾아 헤맸다. 그 날 한민국이 울었고, 나는 두 번을 울었다.   






   다음 날,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한 걸음에 달려오셨다.


   타 도시에서 혼자 지내며 그간 아들 내외가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을 우리 할머니. 그녀의 놀라움과 절망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사자인 아빠의 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밤늦도록 두 분이서 마주 앉아 줄담배를 푹-푹 피며 괴로워하던 날의 모습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이고아이고_ 아범아, 이게 무슨 일이고?  이래 어린 자식새끼들을 놔두고 어째 나갔단 말이고?"

    "나도 모르겠다_ 아무 말도 없이 짐만 싸 갖고 나갔다. 자주 다투긴 했어도 설마설마 이래 될 줄은 몰랐다 나도."

    "연락은_ 연락은 되고? 전화는 받더나?"

    "아니_ 종일 꺼져있다."

    "계속 전화해보자_ 돌아오겠지... 애들 생각해서라도 돌아올 거다."


   그러나 결국...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당장 필요한 짐 몇 가지만 챙겨 오신 후,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아빠, 할머니, 남동생, 나... 이렇게 다시 네 식구가 된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아빠는 돈을 벌고, 할머니는 살림을 맡고, 우리는 학교에 가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할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 말이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놀랄 만큼 반듯반듯 칼주름이 잡히게 교복을 다려 주셨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마중을 나오시진 못해도, 하교할 시간이면 항상 아파트 창문을 열고 우리의 귀갓길을 지켜봐 주셨다. 의심할 여지없이 나는 할머니의 사랑으로 사춘기를 버텼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은 좋든 싫든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남겨진 사람들은 어찌 됐든 충격에서 벗어나 살아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의자 다리가 세 개뿐이면 임시로 없는 쪽을 만들어서라도 균형 잡는 법을 배웠다. 찢어진 가족이었지만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올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떠난 그때의 기억은 해마다 2월이면 여전히 마음을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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