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하다
요즘 들어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 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을 듣고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게 어떤 형태이고 어떤 정의인지는 알 수 있을까.
예전에 읽었던 한 권의 책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라고 사랑을 정의한다. 나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사랑에 가까운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성숙과 관계있고 이를 위해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또 언젠가의 생각은 달랐고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싶은 상대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하는 상태야.”
어제는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았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은 더욱더 의미 있고 뜻밖의 신선한 대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온 대답 중에 저 말이 마음에 닿았다. 상태라는 말이 주는 어감으로 어쩌면 사랑은 시간을 잊거나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자유로운지도 모르겠다. 즉 다시 말해 사랑은 지속적이지 않으면서 영속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것이 경험하고 생각해볼수록 다양하고 어려워진다. 사랑을 여러 환경에서 접하지만 그것들이 갖는 모양과 주는 느낌들은 모두가 다르다. 사랑이라는 것이 마음이 느끼는 것이라면 이 느낌은 내 안의 것인데 나는 너와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네 안의 것들을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하여 너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하는 상태가 그리하여 우리가 사람에서 사랑으로 걸어가는 성숙이라는 길목이 사랑이라면 그것들이 너와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느낌이라는 감정을 노력이라는 형태로 치환하여 발음해보려 할 때 나는 소리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느낌은 대체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깊어지거나 새롭게 떠오르는 순간적인 마음의 상태이고 노력은 지속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마음의 상태를 영속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한 성숙의 행동일 것이다.
숫자 8은 옆으로 놓고 보면 무한대의 기호와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8을 적어 놓고 옆으로 돌려 종이 위에서 무한을 보곤 하였다. 0과 0을 이으면 8이 되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으므로 또한 성숙한 우리가 되기 이전에 이미 관계를 끝냈으므로 우리라는 관계의 성숙도가 0이라고 한다면 0과 0이 만나 0과 0을 잇는 것. 그리하여 무한의 세계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무한을 볼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방법일 것이다. 사랑은 무한을 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혼자서 0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더하면 100도 1000도 될 수 있어 풍요로운 그러나 아무리 곱하고 나눠도 0이 되는 외로운 삶. 그러한 0이 0을 만나 무한의 세계로 들어간다. 함께라서 가능하다. 그리하여 사랑은 함께 무한을 보는 일.
나는 당신과 함께 무한이 보고 싶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