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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머 Sep 27. 2022

이별의 두려움과 산다는 것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여기서의 죽음은 나의 ‘죽음’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말한다.


어린 시절 문닫힌 방에서 선풍기를 켜놓고 자는 엄마를 볼 때면 항상 코 밑에 손가락을 살며시 가져다 대보았다. 엄마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문을 닫은 뒤, 선풍기를 켜놓고 잠이 들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사실로 생각할 만큼 ‘타인의 죽음’에 예민했다.


이별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기 때문에 두려움이  큰지 모르겠다. 준비된 이별이 어디 있겠느냐만 갑작스러운 이별을 여러번 겪은 탓에  트라우마가 한층 커졌다. 갑작스럽다는 건 나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이었다.


특히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너무도 갑작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이별을 준비하고 싶다거나 준비된 이별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음을 준비하더라고 이별은 언제나 슬플 테니 말이다.


언제나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산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내게도 항상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순간이 생겨버린 것이다.


처음 그 두려움이 증폭된 것은 할머니와 이별했을 때이다. 할머니와의 이별은 갑작스럽지만은 않았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별 일 아닐 것이라는 안일함에 기반한 희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일한 희망은 아무런 힘이 없다. 우리는 그렇게 할머니와 이별하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조금만 어디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시면 불안감이 커진다. 할아버지는 늙으면  있는 일이라고 하시지만 나는 엄마  밑에 손을 가져다 대던 어린 시절처럼 할아버지가 주무실  어깨가 들썩이는지 확인하곤 한다.


어느 누구의 남겨진 시간이 더 짧은지 긴지 알 수 없는 법이지만 살아온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이 더욱 짧아지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다.


 함께하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이성적으로 대처할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진다. 내재된 불안감을 표출할 수는 없지만 이별의 불안감이 늘 내 마음 한 켠을 자리잡고 있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이별의 불안감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지속되었으면 한다. 불안감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을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오래오래 불안한 마음을 안고산다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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