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무릎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날 때 뚝뚝. 좌식생활을 하던 나는 양반다리(이 자세를 부르는 호칭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그냥 양반다리로 부르겠습니다)에 익숙했고, 일하면서 의자에 앉아있을 때도 양반다리로 앉거나 다리를 세워 모으고 앉는 것이 편했다. ‘이제 무릎에서 소리가 나는 나이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냈는데 여름에 탈이 났다.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부랴부랴 좌식 생활을 청산하고 의자를 샀다. 쪼그려 앉기, 계단 내려가기, 양반다리 등등 무릎에 좋지 않다고 알려진 자세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활 습관을 고치고 몇 주를 지내봐도 무릎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무릎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한 달 반쯤 지나자 통증은 많이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프기 시작하며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특히 무릎 같은 경우는 관절염과 같이 만성적인 질환일 가능성이 있어 걱정이 됐다. 30대 중반이 되어가며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몸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만성적인 통증이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던 그즈음 동료와 함께 아픈 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동료가 해준 말이 있다. “잘 달래가면서 써야 해.”
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잘 달래가면서 써야 한다는 말은 내 몸에 생기는 많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잘 달래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느끼게 해 주었다. 마치 나의 몸이 장거리 마라톤 파트너인 것처럼, 페이스를 맞춰 함께 호흡하며 달려야 할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껏 몸과 맺어온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몸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아픔은 부자연스럽고 성가신 것이었다. 몸을 혹사시킨 적도 많았다. 당연한 존재, 당연한 몸. 동료의 말을 듣고 알았다. 아픔이 찾아와도 이 몸은 내 몸이고, 나는 이 몸에서 이 생을 살아가야 하므로 내 몸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겠구나.
치료받은 지 한 달 반이 지났을 때 내가 요가를 다시 해도 되냐고 묻자 의사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운동을 안 할 수는 없어요. 무릎 지키려다가 다른 데가 아플 거예요. 요가하세요. 하다가 아프면 다시 치료받아요. 그러다 나으면 다시 요가해요. 그렇게 고쳐가면서 써야 해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쩌면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통증이지만, 큰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치면서 쓰는 거구나. 아프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상황에, 나이에 맞게 잘 달래면서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구나.
내가 태어난 이래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뛰어온 심장, 늘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준 두 발,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머리, 이렇게 글을 쓰고 나눌 수 있게 돕는 두 손. 삶을 잘 살아내도록 돕는 나의 몸이 삐걱거리는 순간이 와도 원망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잘 데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재우고, 잘 먹이고, 잘 달래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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