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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더핑크 Oct 24. 2021

제주도 마지막 날, 수퍼마켙과 말고기는 처음이라

[앵콜곡] 드보르작 제9번 교향곡 '신세계로부터'

   비 오는 날씨에 아침 조식을 챙겨 먹고 아주 느린 속도로 쉬면서 짐을 정리하며 천천히 숙소를 나선다.


  제주시내에 다다르자 타이어 공기압 낮다는 경고등이 들어온다. 주유소에 LPG를 채워 넣으며 여쭤보니, 건물 뒤편에서 공기압을 셀프로 채울 수 있다고 하신다. 한번 해보자 싶어, 호기롭게 가봤지만 역시 잘 모르겠어서 타이어점을 찾으러 가려던 찰나, 엄마가 내려서 쓱 한번 훑어보신다. 혹시 타이어로 줄을 밟고 있어 안 되는 게 아니냐길래, 혹시나 싶어 자리를 옮겨봤더니, 된다! 나는 그렇게 차에 탄 채로 내가 아니라 30년째 장농면허인 엄마가 공기압을 채워 넣으셨다!


   미술관을 좋아하던 나는 노형수퍼마켙을 장바구니에 살짝 담아두긴 했지만, 저렴하지만은 않은 입장료와 엄마의 취향과 맞을까 하는 우려로 우중 코스로만 잡아두고 필수코스에 넣는 것은 보류해 둔 상태였다. 마지막 날, 비가 내리자 주저할 것도 없이 실내 활동으로 노형수퍼마켙을 제주시내 쇼핑과 함께 마지막 제주도의 여행 일정으로 올려놓았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엄마는 처음 가보는 미디어 아트 전시회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흑백으로 출발하는 전시, 잃어버린 색을 찾아 떠나는 여행

   지인의 전화가 몇 통 걸려오자 엄마는 오늘이 제주도에서 마지막 날인데 비가 와서 전시회에 가는 중이라는 설렘 가득한 얘기를 몇 차례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덧 노형수퍼마켙이다. 노형 수퍼마켙은 잃어버린 색을 찾아, 흑백인 오프닝 장소에서부터 시작해 줄곧 빛의 다채로움이 이어지던 그야말로 전시회장의 신세계였다.

  여행의 시작 무렵 사진을 앞모습을 찍어야지 왜 뒷모습을 찍는 거냐시던 엄마는 이제 나의 뒤태 사진 찍기에 완벽 적응하여, 아트 전시를 찍고 있던 나의 뒷모습을 나도 모르게 도찰해 꽤나 그럴싸한 사진들을 많이 건졌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미디어 아트

 

   엄마와 나에게도 모두 신세계였던 노형수퍼마켙을 뒤로하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몸국과 고사리 해장국을 먹었는데, 고춧가루 맛이 고사리 향을 가려버려 처음 먹었던 그 감흥이 다시 느껴지진 않았지만, 비 오는 날 나름 뜨끈한 국물에 속이 든든했다. 제주도 스벅에서만 판다는 음료와 디저트, 기념품을 구입하고, 쇼핑 바이 제주에서 감성 소품 구경과 기념품들도 사고 나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현무암 러스크와 제주 스노잉 백록담 음료는 전 지점에 입점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맛있었다. 감귤칩과 당근 쫀드기도 맛있다.

   비행시간 탓에 좀 이른 저녁을 먹고 렌터카 반납을 하기 위해 배가 고프지 않지만, 의무감에 무언가 배를 채우기로 했다. 많이 배가 부르지 않을 법한 고기 국숫집을 찾아갔으나, 라스트 오더가 막 15분 정도로 아쉽게 지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검색한 제일 가까운 1분 거리의 맛집은 말고기 요리점이었다. 말고기는 사실 전혀 고려 대상에조차 없던 메뉴인데, 엄마는 안 먹어본 것도 먹어보자며 흔쾌히 가자 하신다.


    우리 모녀에게 말고기는 처음이었는데, 특별한 냄새도 없고 말고기라 느끼지 못할 만큼 맛있었다. 육회는 잘 못 먹어서 말 불고기 초밥과 소시지로 주문했는데, 시식해보라며 건네주신 육회 초밥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말 불고기 초밥은 향긋한 파가 씹히며 부드럽게 감기는 초밥에 마지막을 감싸는 바삭한 부각의 고소함이 더해져 그야말로 별미였다. 소시지는 육즙 터질 만큼 기름도 많아 안주용이 좋을 듯하고, 식사로 하려면 말 육회 초밥과 말 불고기 초밥이 더 좋을 것 같다. 이것도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 추천 메뉴!


돌아오는 비행 편에서 생각한 엄마와의 여행에서 좋았던 점:

나보다 좋은 엄마의 폰 성능 - 알고 보니 좋은 사진 화질, 오래가는 바테리와 용량으로 넉넉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몇 회 거듭하자 급성장한 엄마의 사진 찍기와 도촬 능력으로 제법 많이 건졌던 꽤 괜찮은 사진들.

65세 이상 무료입장 및 할인과 우도면 운행 허용차량 승선 가능.

엄마의 뜻밖의 재능 정비공 능력.

선크림 담당 매니저 활약으로 여름 햇살과 같았던 제주도의 3일 찡한 햇살에도 비교적 덜 탔다.

휴양림에서 빛을 바란 엄마의 준비력, 수건과 비누.

두 번째 엄마의 준비력, 비 오는 날 우양산.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어 자칫 욕심에 무리한 여행이 될 뻔했으나, 엄마의 느린 속도에 맞추다 보니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레 짜게 된 건강과 힐링 위주의 코스.

만족감을 선사하기 쉬웠던 엄마의 낮은 기대치. 엄마의 의견을 최대한 듣고 취향을 반영하려 했지만, 엄마는 항상 내가 좋을 대로 하라고 하셨고, 어딜 가든 새로워하셔서 조율이 비교적 쉬웠고, 나 또한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경험치로 맛있는 특산물을 잘 알아, 고사리 육개장, 한라봉 아이스크림이란 메뉴 선택의 영감을 주심.

새벽형 인간인 엄마 덕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가 되어 여행을 사람들을 피해 한가로운 시간 동안 즐길 수 있었다. 또, 그 덕에 흐린 일출과 정석과도 같은 일출도 성산봉에서 두 번이나 맞이했다.


   음악 선율 같기도 하고 랩 같기도 한 리듬을 타는 듯한 카리스마 목소리 캡틴과 온화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캐빈크루의 안내방송이 나오며 제주도에서 빠져나와 이제 부산에 다다랐음이 비로소 실감 난다. 기다림의 무료함을 채워주고 낯선 비행의 초조함을 달래줄 음악이 안내방송이 끝나자 연이어 나온다. "We can fly~"란 가사가 나오는 음악 선곡도 좋았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일상의 낯선 익숙함이 좋다. 여행을 다녀오면 늘 익숙했던 일상도 새롭게 느껴진다. 핸드폰 바테리를 아끼기 위해 더 이상 폰을 자제할 필요도 없고, 발로 액설을 밟던 여행의 습관에서 벗어나 내 차를 타고 손가락만으로 크루즈 운전을 하기 시작하자, 늘 익숙했던 일상의 편리함이 다시금 떠올라 새로우면서도 예전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이제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여행의 번거로움이 고생스럽고, 비용이 부담스러운 사치라 느껴진다면 집에서 편하게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게 정답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풍경에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번뇌와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고, 돌아와서는 일상이 다시 여행이 되는 듯한 연착륙의 경험과 여행에서 사 온 기념품과 먹거리들로 좋았던 기억을 추억할 수 있는 여행도 선호하는 편이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 빛바랜 사진첩 속 나의 여행에 대한 추억은 항상 고생은 시간이란 파도에 떠밀려 깨끗이 씻겨 내려 가버리고, 하얀 모래알과 산호빛의 조개껍데기의 좋은 추억들만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


   긍정적인 엄마는 비 반 해 반이었던 이번 여행을 비가 와서 숲길의 산책이 덥지 않았고 전시회도 가 볼 수 있어 좋았고, 맑은 날은 하늘이 맑아 모든 것이 좋았다며 벌써부터 좋은 추억들만 되새김질 중이시다. 뚱뚱해 보이게 나와서 사진은 한사코 별로 안 내키신다던 엄마는 휴대폰 속의 사진들을 공항에서 들춰보시더니, 막 찍어도 그저 예쁘게 사진에 담기던 알록달록 영롱한 빛깔의 제주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제 막 부산에 도착했는데 벌써 몇 차례 내 폰에 담긴 사진은 언제 넘겨 줄 거냐며 성화시다. 잘 나온 사진 몇 장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드려 자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뒀다.


   늘 길어도 3~4일에 지나지 않았던 제주도를 여유롭게 5박 6일의 일정으로 다녀오다 보니, 휴직의 여유를 온전히 즐기고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병원의 치료를 한번씩 받아야 되었기에 제주도 한달살이는 포기해야 했던 이번 휴직에서, 제주도는 언제든지 가도 예쁘고 기분 좋은 곳이었다. 예전 여행에서 미처 맛보지 못한 코스들로 다시 가도 처음 본 신세계와 같았던 이번 제주도 여행!


우리들의 제주 교향곡 연주는 그렇게 한차례 앵콜 공연을 끝으로 성황리에 막을 내린다.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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