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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이 반복된다면

후쿠오카 국립 미술관 <상설 전시>

by 김채미 Mar 19. 2025

 파란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넘실거리고, 하얀 모래 위에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다섯 명의 여인이 손을 잡고 춤을 추듯 뛰놀고 있었다. 그 뒤로 세 명의 여인이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몸을 수그려 모래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고 푸른 하늘 위에는 하얀 갈매기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해안가의 나른한 오후>. 후쿠오카 미술관 상설 전시에서 가장 먼저 보였던 소장품이었다. 


 프랑스 바다를 배경으로 그렸다는 작품은 평화로워 보였다.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더욱 그랬다. 여성들의 얼굴에는 근심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이 순간만을 즐기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들과 3박 4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 그림이 생각났다. 넘실대는 파도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원을 그리고 뛰어노는 소녀들. 작은 비행기 창문 아래로 푸른 바다가 선명하게 보여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내 왼쪽에는 경이가 고개를 숙이며 잠들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영이가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어며 나는 핸드폰으로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울려 퍼졌는 데도 두 사람은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젖히고 의자를 눕혀 지난 시간을 생각했다. 3박 4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많이 웃고, 많이 먹고, 많이 걸었을 뿐인데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오히려 여행했던 순간들이 꿈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포근했기에 생각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양 옆에 잠든 친구들을 다시 한번씩 번갈아보며 이게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잘한 사건들에 웃어넘기고, 지나간 추억들을 닳도록 말하고, 웃긴 사진과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면서 또 웃고, 이런 일상들의 반복을 자주 마주한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여행을 하는 내내 친구들은 내 이름을 자주 불렀다.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문득 "채미야."라는 말을 이번 여행에서 유독 자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이와 경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지금도 메아리처럼 들릴만큼. 영이와 경이는 내 이름을 자주 부르는 친구들이었다. "오늘 채미 옷 이쁘게 잘 입었다!", "채미가 찍은 사진도 앤티크 하고 이뻐!", "우리 채미만 따라다니자.", "채미가 일본어를 알아 들어서 너무 좋다." 여행하는 내내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말은 "고마워.", "너무 웃기다.", "재밌다.", "덕분이야."라는 말들이었다. 그래서 여행이 더 여운이 깊었다. 종일 웃고 종일 따뜻한 마음만 주고받아서. 핸드폰 앨범을 가득 채운 사진에는 그런 순간들만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노곤한 피로를 풀며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도 분명 나를 기쁘게 하지만 행복은 그것과 결이 다른 것 같다고. 행복은 좀 더 작고 소소한 것이 모여 나를 충만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가족들끼리 모여 먹는 저녁밥이, 종종 친구들과 만나 떠난 여행에서 쌓은 추억들이, 일 년에 두어 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로움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조용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느끼는 나른한 오후가, 이런 작은 파편들이 쌓여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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