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인 서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밤(La notte)>
영화 속 여인은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남편과 과거에 데이트를 했었던 장소에 가서 소년들이 작은 물로켓을 쏘아 올리는 것을 보고, 시내 골목골목을 목적 없이 돌아다닌다. 그녀는 시종일관 심드렁한 얼굴로, 허무함에 빠진 얼굴로 길거리를 돌아다닐 뿐이다. 이따금 눈길을 끄는 것에 잠시 시선을 줄 뿐 다시 몽롱함에 잠겨 거리를 쏘다닌다.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소설가가 된 그는 쏟아지는 파티 초대장에 응하지만 진실로 마음이 동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담긴 우울함과 허무주의 속에서 자아를 잃고, 전도된 가치 속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듯 방황한다.
질 들뢰즈는 <시네마 2 이미지-시간>이라는 책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분석한다. 그는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대조를 이루는 유럽 영화에 대해 서술하며, 네오리얼리즘은 비선형적인 구조를 사용하여 인간 내면을 집요하게 파헤친다고 말한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밤>을 보아도 그러하다. 이 영화는 낮에서부터 밤이 될 때까지 시간이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만, 중간중간에 묘사되는 장면들은 개연성 없이 어딘가 들쑥날쑥하다. 한 부부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친구를 병문 하고, 남자는 집으로 여자는 길거리를 쏘다닌다.
일반적인 영화의 플롯이라면 그들의 행동들은 모두 어떠한 사건의 발달이 될 계기로 작용해야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개별적이며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물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들이 파티에 가고, 거리를 방황하고, 술집에 가서 한 무희의 춤을 관람하는 행위에는 모두 긴박함 따위 없다. 사건 진행을 위한 플롯이 아닌 오롯이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묘사일 뿐이다. 때문에 씬과 숏은 호흡이 모두 길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잔잔함 속에 고요하게 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치 호수에 누군가 작은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키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사람의 관계와 세계가 서서히 뒤틀리고 있었다.
영화의 파국은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두 사람의 친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듣고 끝내 흐느끼는 아내 리디아, 그 사실을 모르고 파티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죠반니, 그리고 그 사실을 목격하고서도 리디아는 오히려 상대 여자를 거리낌 없이 대한다. 이 기이한 부부의 모습을 보고 사이에 낀 발렌티나는 "당신 부부는 정말 소름 끼치는군요." 하며 두 사람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발렌티나를 보다가 파티 현장을 떠난다. 소란스러운 장소에서 멀어져 한적한 들판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그제야 진실로 대화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속내를 터놓는 것이다. 리디아는 더 이상 마음을 느낄 수 없다고 하자 죠반니는 그녀를 붙잡는다. 그러자 리디아는 주머니에서 한 편지를 꺼내 그에게 읽어준다. 죠반니는 그 편지가 당신을 사랑했던 친구이자 방금 목숨을 잃은 토마스의 것이냐고 묻자 리디아는 아니라고, 당신이 젊은 시절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지난 허무 속에서 슬픔을 느끼고 들판을 구른다.
오랜 시간이란 이런 것일까. 영화는 오랜 사랑이 가지는 권태와 허무를 표상했지만, 비단 사랑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다. 시간이 지난다는 것은 그만큼 권태로움이 쌓인다는 말이다. 오래 다닌 직장, 매번 같은 일상, 화려한 도시와 번쩍이는 파티, 수많은 사람 안에서 느끼는 개인의 고독과 허무, 매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자극이 가미된 뉴스들 가십들, SNS들. 이 모든 것이 한순간 지겨워질 때가 있다. 아무리 새로움을 찾으려고 해도 결국 다시 권태와 허무가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20세기의 상실과 21세기의 상실은 발생 원인은 다르겠지만, 결국 비슷한 허무주의에 연결되어 있었다.
권태를 만들게 하는 건 단절이다. 대화를 하지만 실제 맘을 터놓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기 때문에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맘 같아선 책으로 두 사람을 내려찍고 대화 좀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어려운 일일테다. 왜 나이를 먹으면 속마음을 터놓는 것이 유치하고 어려운 일로 여기는 걸까. 어긋남을 다시 결합하는 건 솔직함이다. 여덟 살 먹은 아이들이 가장 잘하는 말처럼 말이다. "나는 돈가스가 좋아요, 오이는 싫고요."와 "당신이 친구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이런 파티에만 참석하면서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싫어."는 비슷한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