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나 분갈이를 해주어야 할 때가 오면 그간 화분 속에서 자라난 뿌리를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점점 늘어나는 잎의 개수와 커가는 식물의 몸집을 보며 식물의 성장을 가늠할 수 있지만, 뿌리는 화분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래서 분갈이를 위해 화분을 엎어 볼 때면, 포장된 선물 박스를 뜯어보는 것 같은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블랙벨벳 알로카시아의 자구를 캐기 위해 처음 화분을 엎어 보았을 때, 식물의 몸체 아래로 꽉 찬 뿌리들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몬스테라의 화분 크기를 업그레이드해주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길게 뻗은 공중 뿌리가 흙속을 파고 들어가 굵은 뿌리줄기를 만들어 낸 몬스테라는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튼튼한 모습으로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다.
풍성하게 화분을 가득 채운 뿌리는 내가 수개월을 정성 들인 노력의 산물이지만, 반대로 뿌리가 상하거나 녹아 없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간혹 잘 자라던 식물이 갑자기 새잎을 뿜어내길 멈춘다거나, 기존에 건강했던 잎마저 시들해진다면 뿌리에 과습이 왔음을 의심해 볼 수 있다. 흙의 배수가 좋지 못하거나 흙이 잘 마르지 않는 과습 상태가 지속되면 식물의 뿌리가 무르고 썩거나 녹아버리기도 한다. 잎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화분을 엎어 보면 높은 확률로 뿌리에 문제가 생겨 있다. 결국 흙 속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이는 뿌리는 식물의 생명력의 원천이자 식물의 생장 활동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잎이 아프거나 시들 때 혹은 병충해의 습격을 당했을 때, 슬프지만 병든 잎을 과감히 도려내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언젠가 블랙벨벳 알로카시아의 상한 잎을 한 장만 남기고 모두 잘라낸 적이 있다. 벌거숭이처럼 한 장만 덩그러니 남겨진 잎을 본 남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식물의 안위를 물었지만, 나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뿌리가 튼튼한 식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뿌리가 튼튼한 식물은 잎이 한 장 남았을 지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지언정 언젠가 다시 푸른 잎을 만들어 낸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삶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식물도 사람도 항상 푸를 수는 없다. 우리에겐 잎을 떨구는 시기도, 잎을 마구 뿜어내는 시기도 온다. 하지만 마음속 뿌리가 튼튼한 사람은 가장 힘든 순간에도 다시 힘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내 마음속에 내려 있는 뿌리는, 내가 언제건 돌아가 쉴 곳이 있다는 안전한 믿음의 감각이다.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도 집에 돌아와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하루의 끝을 평온으로 마무리 지으려 노력한다. 지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자신의 일처럼 고민해주는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차곡차곡 내려앉는다. 친구들이 무심히 카톡방에 보내주는 고양이 사진과, 엄마의 힘내라는 카톡. 졸린 눈을 비비며 매일 같이 나의 출근을 배웅하는 남편의 얼굴이 내 마음의 양분이 되어 준다. 사랑하는 사람들, 식물, 고양이, 음악, 책, 때로는 홀로 보내는 시간 덕분에 나는 다시금 새로운 날을 준비한다. 나는 시시때때로 절망하지만, 영원히 절망하지는 않을 힘을 얻는다.
@illust&writing by 주페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