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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Apr 19. 2023

아저씨들 시방 머 하는 겨?

내 이야기

관례를 깨고 이제 소싯적 에피소드를 꺼내 보겠다. 

이유는 모른다. 심경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독거노인으로 불리게 된 이후에 자연스레 보여지는 심약한 모습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사실이니까.


누가 고향을 물어 오면 대충 보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난 그곳에서 나지도 자라지도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초등학교까지 다닌 대전이 차라리 맞다. 그런데 내 나이 8살에 부모님이 양조장을 운영하러 보은으로 들어가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대전에 따로 떨어져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 댁으로 가서 진탕망탕 뛰놀며 온전히 휴가를 즐겼으니 오히려 더욱 사랑스럽다. 유년기의 시골을 고향으로 삼아 이렇게 남보다 하나 더 가지게 되었다. 고향이 두 곳이면 안된다는 법은 세상 어느 법전에도 없으므로 그때그때 편한 대로 사용한다. 



시골에 가게 되면서 점차 이웃 아이들과 동무하며 놀았으나 일차적인 놀이터는 집과 붙어있는 '술도가都家'였다. 술도가 끔 마시긴 했지만 갈증 나서 물 대신 먹었지 당시에는 맛을 알고 마신 건 절대 아니었다. 집에 항상 술이 물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운명'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양조장의 구조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사입실 내부 : 구글

살림집 서쪽에 마당이 있고 북쪽에는 두꺼운 목재로 만든 육중한 대문이 달렸다.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나이 들어 찾아보면 왜 그리도 작은지... 를 유추하면 양조장 대문도 그랬을게다. 허나 당시엔 밤에 대문을 닫으면 거대한 성곽 안에 들어와 꼼짝없이 갇힌 느낌이 들었다. 

대문의 우측에 사무실이, 좌측에는 직원 숙직실이 있다. 짐 자전거가 여럿 세워져 있던 중앙부 공터를 중심으로 동쪽 편은 살림집이 차지하고 남쪽과 서쪽이 양조장 건물이다. 남쪽은 제일 왼편이 보일러실, 그 옆이 제성실製成室, 사 입실仕込室.  서쪽은 냉각실冷却室, 종국실種麯室이 위치했다. 


보일러실에서는 경유로 버너를 때어 증기를 내고 이 증기로 커다란 나무통 속에서 고두밥을 짓는다. 지금처럼 편리하고 안전한 전기 버너가 아니다. 불을 처음 붙이려면 한동안 시커먼 연기가 사정없이 피어오르고 중증 천식 환자처럼 쉑쉑 거리는 소음과 합세하여 마음 여린 나를 충분히 겁먹게 만들었다. 

고두밥이 다 쪄지면 냉각실로 옮겨 넓게 펴서 식힌다. 종국실은 고두밥에 누룩을 버무려서 저장해 놓는 사시사철 무더운 방이고 사입실은 항아리에 이 모두를 조합한 원료와 물을 부어 발효를 시키는 방이다. 발효가 끝난 원주를 제성실에서 채로 거르면 모리미(전내기)가 나온다. 모리미는 알코올 도수가 높으므로 맹물을 배 정도 첨가해서 시판용 막걸리를 조주 한다. 술 찌기인 지게미는 돼지우리로 가거나 원하는 마을 주민에게 나누어준다.

고두밥

기억을 되살려 보면 냉각실에서 식히던 고두밥의 대부분은 사입실로 직접 들어가고 나머지는 누룩과 나란히 종국실로 보내져 나중에 함께 섞어 발효시킨다. 극히 일부는 냉각실의 조그만 환기통을 통해 외부로 빼돌려진다. 밖에서 쌀 고두밥을 먹고 싶어 애처롭게 쳐다보는 동네 아이들에게 몰래 넘겨주기 위한 나의 소행이다. 





양조장에는 일하는 아저씨가 몇 분 계셨는데 난 이들과 사이가 무척 좋았다. 그들은 날 '작은 사장'이라 부르면서 잘 어울려 주셨다. 어리지만 도시물을 먹던 내가 그들에겐 상대가 되었던 모양이다.


1963년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하루는 시원한 제성실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종업원 아저씨 둘이 사입실 앞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아저씨들이 사입을 하는 중에 내가 심심해져 그들에게 다가갔다. 사입仕込이란 식힌 고두밥과 종국을 버무려 단지 안에 넣는 작업이다.


나는 뻔히 알면서도 그냥 별 의미 없이 물어보았다. 

"아저씨들 시방 머 하는 겨?"

사입실 외부:구글

그중 한 분인 경수 아버지가 대답해 주었다. 지금 기억에 당시 그의 나이는 40대 초 언저리로 여겨진다. 술을 너무 좋아해 마음껏 마시려고 취직했다는 소문이 어린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아들인 경수도 커서 우리 집에서 술 배달을 했고 부인인 경수엄마도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오랫동안 우리 집 부엌일을 하셨던 거의 가족 같은 분들이었다.


" 으응, 사입하는 중이야. 작은 사장님도 우리랑 같이 해보고 싶어?"

아저씨 말에 찰나적으로 내 응답이 튀어나왔다. 지금도 가끔 그러는 것처럼. 

그랬더니 아저씨들이 순간적으로 입과 코에 게거품을 물며 미쳐 날뛰었다. 한 사람은  배를 움켜 잡고 컥컥거리지 다른 아저씬 그대로 쓰러져서 바닥에 뒹굴고 난리가 났다. 그때 나는 진짜 저네들이 저렇게 웃다가 죽지 싶었다. 왜들 그러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내뱉었다고 저러는지 어리둥절하여 다시 또 곰 씹어 보았으나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었다.


정말로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니. 난 사입은 할 줄 몰라. 오입은 잘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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