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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Mar 07. 2023

짝 잃은 양말의 법칙

"박사님, 풍치는 치료가 안 되나요? "
학위를 받은 지 30여 년이 넘어 이제는 논문 제목도 아리송하다. 그래서 그런 호칭으로 불러주는 환자분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네는 '박사' 타이틀이 약간 더 믿음이 가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만성 치주염으로 소실된 치아 주위 조직들이 도로 살아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네, 만성병이거든요.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병이 많이 진행되었기에 이제부터의 치료 목적은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을 일단 목표로 삼아야 해요."

잇몸병의 진행 과정

너무나도 무정하게 들리겠지만 환자에게 '질병에 걸려있다'는 상황을 먼저 납득시켜야 한다. 우연히 주변의 조직이 소실되거나 약해지지는 않는다.

본인이 경각심을 가지고 섭생에 임하여야 후속 치료에도 한결 도움 된다. 질병이 당장 생명과 관계가 없다 해도 삶의 질을 크게 떨어트리기 때문에 야속해도 냉정히 인식케 한다.

"완전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쉽게도 어쩔 도리 없다. 쏘아 버린 화살을 되돌리진 못하더라도 피하거나 맞더라도 비켜 맞는 쪽을 택하여야 한다.


'엄마 뱃속에 들어가 새로이 태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걸...'

.



"형님. 아파트 같은 레인 18층 최원장 댁에 놀러 왔어요. 한잔 하러 오세요. 와인 좋은 게 있는데 맛 좀 봐주세요."

Young wine  vs. Old one

지난 일요일 밤 4시간짜리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터라 피곤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모처럼의 초대이니 만치 발을 질질 끌며 여섯 층을 걸어 올라갔다.

판은 앞서 커졌고 세 사람 모두 얼굴이 벌게져있다. 커다란 사각 식탁 위에는 코르크 마개가 3개가 놓였으며 아래에는 아직 따지 않은 와인병이 여럿 대기한 상황이었다.

"오래전에 선물로 들어온 건데 맛이 어때요? 비싼 건지 싸구련지 모르겠어요."

테이블에 눈길을 주어 살펴보니 품종은 피노누아에 2000년 빈티지다. 금박을 입힌 테두리와 옹색한 다리를 지닌 물 잔에는 와인이 가득 담겨있다. 향은 여하 간에 우선 색부터 맑지 않다. 잔을 기울여 보니 림은 벌써 회색 빛이 돌고 코아는 흐리멍텅 황갈색으로 기이 변했다. 와인은 황홀한 전성기를 지나 섣달 길가에 뒹굴다 스러져간 낙엽처럼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편안한 귀부인의 자태마저 사라졌는 걸...'



'계 System의 엔트로피(Entropy)는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 법칙이다. 법칙이라 함은 '언제나 성립하기 때문'이다. 고립계에서 입자들의 '섞임'은 저절로 일어나기에 '항상 무질서도가 증가'한다. 반대로 정리와 정돈이 되는 '분리'는 확률적으로 가망 없다. 예를 들면 자그마한 병에 맑은 물을 넣고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린다 치자. 그러면 스스로 잉크는 물로 스며들어 퍼지지만 다시 물과 갈라져서 잉크만 따로 모일 공산은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 잘 설명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블로그의 엔트로피 항목을 보자. 아래 그림에서 입자 개수가 20개일 때 다시금 분리가 될 확률이 0.0005%이다. 겨우 탄소 12g 질량의 아보가드로수만큼의 원소일 경우에도 각각 원위치로 돌아 올 확률은 온 인류가 100만 년을 헤아려도 셀 수 없을 만큼 작은 수이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선분홍 깔끔한 아이의 잇몸, 자줏빛 신선한 과일향의 와인으로 되돌아갈 개연성은 제로다. 어쨌든 확률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제로에 수렴한다. 시간의 전과 후, 즉 흐름을 드러내는 우주의 유일한 법칙이다.

https://blog.naver.com/with_msip/221974536459













'도대체 내 양말 한쪽은 어디 가 있는 거지?'

두한족열(頭寒足熱)을 신봉하는 나는 으레 덧양말을 신고 자야 한다.

오늘 저녁 수면용 양말을 찾다가 옷장에서 하나하나씩 누은 외 양말짝을 만난다.

발이 달렸는지 날개가 붙었는지 저 놈의 양말은 아무 말도 없이 홀로 잽싸게 사라진다. 지네처럼 작고 뱀처럼 미끈한 녀석들보다 훨씬 더 으슥한 곳으로 찾아들기 잘하는 숨바꼭질 선수다. 운동장의 유치원생 대열이 흩어지듯 질서 정연함을 깨트려 몸소 엔트로피증가법칙을 실증한다.

어쩜 세탁기에 들어가면 곤욕을 치러야 하니 두려워 도망 다니는지 모르겠다.

혹여 양말이 발꼬랑내를 지독히 싫어하여 나를 기피하는 게 아닐까? 그 생각에 미치자 곧바로 술래잡기를 멈추고 짝짝이를 신은 채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렇게 후회를 해 본다.


'어젯밤에 냄새 안 나게 발가락을 제대로 닦을 걸...'



짝 잃은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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