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수민이 핸드폰처럼 생긴 PDA 단말기 측면을 누르자 빨간색 레이저가 선반에 바코드를 읽어낸다.
“아씨. 여기도 다 찼네. 넣을 때가 없잖아.”
물건이 가득 담긴 상자가 가득 쌓인 카트를 끌고 빈칸이 있는 진열장을 찾아다닌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파마와 염색으로 다 상해 치렁치렁 간신히 달려있는 머리를 한 관리자가 말한 주의사항은 열 손가락을 넘길 정도였다. 무거운 물건은 아래 칸, 가벼운 건 제일 위칸, 작은 건 작은 칸에, 한 칸에 여러 종류를 섞어서 넣을 것, 한 칸에 다섯 종류 이상에 물건은 넣을 수 없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라면, 통조림, 신발, 옷, 장난감, 세제, 전구. 세상 모든 물건을 다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수민은 간신히 찾아낸 빈칸에 남성용 브이넥 니트를 50장 쌓아 올렸지만 금세 와르르 무너졌다. 유난히 흐물거리는 재질이라 진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라 이런 일 안 해봤구먼.” 환섭은 우수수 떨어진 니트를 10장씩 가지런히 포개어 진열했다. 옷이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공간이 남은 진열장만 골라 넣었기에 쓰러짐 없이 깔끔했다. 연륜이 잔뜩 묻어나는 실력이었다.
“할아버지는 아까...”
“잘 왔네? 기둥뒤로 곧장 가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그니까 여기가... 물류센터라면서요? 주.. 죽은 사람들이 일하는... 그럼 할아버지도..?” 수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죽었냐고?”
수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여기 있지.”
“왜... 천국 안 가시고요.”
“천국 갈지 지옥갈진 기둥 뒤로 가봐야 알지.” 환섭은 껄껄껄 웃었다.
“줄 설 때 들었는데, 지옥 갈 사람들은 여기 못 온다던데요? 바로 지옥행이라고...”
“천벌 받을 놈들은 그렇다대?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편하게 올라가서 쉬시지. 왜 여기서 일하고 계세요?”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할멈을 혼자 두고 와서.”
“아... 죄송해요.”
“아가씨가 왜 죄송해. 참 수민이라고 했지?”
“네.”
환섭은 주머니에서 종이컵 두 개와 믹스 커피 두 개를 꺼내 층마다 두 개씩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왔다. 구멍이 송송 뚫린 비스킷이 5개 들어있는 포장지를 뜯어 커피와 함께 수민에게 건넨다.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지?”
“감사합니다.” 수민은 넙죽 받아 단숨에 먹어 치웠다.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것들인데 달달하고 짭짤한 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미량이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에너지가 생겼다. 수민은 커피 한 방울, 과자 부스러기 한 조각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아쉬운 입맛을 다셨지만 환섭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 저는 죽었는데 왜 목이 마르죠?”
“삶에 대한 갈증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럼 죽었는데 배는 또 왜 이렇게 고픈 걸까요?”
“채우지 못하고 온 것이 있으니까.”
의외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아예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나진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었다고 하기엔 당장 먹고살아야 할 걱정을 또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물류센터 옥상으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기숙사로 걸어가며 환섭 할아버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기숙사 비용은 매일 받는 일당에서 공제된다는 것. 옷과 음식을 포함한 모든 생필품들은 기숙사 옥상에 있는 직원용 마트에서 구매 가능하다는 것. 요약하자면 죽어서도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둥뒤로 가면 (그게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지만) 더 이상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수민은 그렇게 갈 순 없었다.
정훈과 수민은 15살 때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수민은 정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키는 180cm이 넘고 머리는 새만큼 작아요. 외계인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그렇게 15살에 만난 그들이 벌써 26살이 되었다. 정훈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수민을 사랑했다. 수민은 하루도 빠짐없이 정훈을 미워했는데도. 수민은 10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번 생일엔 정훈이에게 고백을 할 것이다. 조금 늦은 나의 사랑이 그에게 선연히 닿길 바라며. 어제 바로 이 시간, 수민은 퇴근을 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상암동에 가는 길이었다. 가는 내내 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을 보며 정훈에게 할 말을 연습해 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닿질 못했다. 그게 그녀가 물류센터에 남고 싶은 가장 큰 이유였다.
‘어떻게든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바닥에 새겨진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배정받은 505호에 도착했다. 2인 1실이라고 들었기에 예의상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오른쪽 가슴에 서연 여고라는 마크가 선명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책상에 있는 물건들을 급하게 치우고 있었다. 그녀의 공간에는 물건들과 정체 모를 택배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수민의 등장에 당황한 소은의 물건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데 물건 틈새에 껴있던 사진이 수민의 발치로 떨어진다. 사진에선 소은 또래에 남고생이 활짝 웃은 채 브이를 해 보이고 있었다. 수민은 이 아이들에게서 자신과 정훈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얼굴의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소은이 황급히 사진을 치우며 수민을 노려봤다.
“왜 노크도 안 하고 막 들어와?”
고등학생이 자신에게 대뜸 반말을 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괜히 꼰대 소리 들을까 수민은 말을 삼켰다.
“노크했어요. 그쪽이 못 들은 거지.”
“새벽까지 책상에서 작업하는 날이 많으니까 스탠드 눈부시고 시끄러워도 참아. 나보고 정리니 청소니 그런 거 해라 마라 할 생각 하지도 말고. 화장실에 있는 휴지, 샴푸 같은 건 다 내 거니까 건들지 마.”
“이 방이 그쪽거예요? 나도 엄연히 반절 정도는 지분 있어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시죠. 그리고.”
소은은 ‘어쭈 이거 봐라’ 눈을 부라렸고, 수민은 한마디를 덧붙여 그 타오르는 활화산을 폭발시켰다. “반말하지 마세요.”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못한 것일까 싶은 상태에서 깨어나 생전 처음 해보는 물류센터의 일로 온갖 먼지, 땀까지. 최악이다. 샤워를 하며 온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수민. 혹시나 핏자국이나 찢어진 부위가 있으면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추측하기 위해서였다. 팔다리에 약간 멍자국이 있는 것 말고는 목숨을 잃을 정도에 치명타는 없었다.
“나 심장마비 뭐 그런 걸로 죽었으려나?”
샤워를 끝낸 후에도 일부러 뜨거운 물로 한참 어깨와 등 부분에 뻐근한 근육을 풀고 밖으로 나온 수민.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소은은 책상에서 빨간펜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만화를 그리기도 하고, 중얼거리면서 수만 개의 글자를 일기장에 토해내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돈으로 저걸 다 샀는지 싶은 물건들을 꼼꼼히 살피고, 풀었다, 해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가 둘둘 말고 나온 수건을 매만지는 수민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일까지 약속 지켜.”
소은은 물류센터에서 오늘 일한 일당은 다음날 오후 3시까지 들어온다고 했다. 생필품이 하나도 없는 수민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을 빌려주기로 한 대가로 내일 일당을 받자마자 직원용 마트에서 새 제품으로 사서 갚기로 했던 것이다. 샴푸 두 번 펌핑 쓰고 다음날 샴푸 한 통으로 갚아야 한다니 사채업자보다 더한 짠순이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수민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요. 혹시 드라이기 있어요?”
소은이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곤 서랍에서 꺼낸 드라이기를 수민 침대로 던진다. 수민은 잽싸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데 전기선이 얼마나 짧은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팔 각도가 제대로 나오질 않아 바람이 엉뚱한 데로 불었다. 때문에 20분 넘게 열심히 말려봐도 머리가 쉬이 마르질 않았다.
“이제 그만 좀 해.”
윙윙 대는 드라이기 소리를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소은이 신경질적으로 수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돌아 서있는 수민이 단발머리를 이쪽저쪽 돌려가며 말리고 있다. 소은은 수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민은 조금씩 소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눈치를 살폈다.
“다 했어요. 금방 끌게요.”
사부작거리지도 않고 책상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소은에게 수민이 드라이기를 건넨다. 소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수민은 움찔한다. 설마 드라이기도 새 거로 사 내라는 건가.
“어떻게 죽었어?”
“네?”
“언제, 어떻게, 죽었냐고. 기억나는 거 없어?”
“모르겠어요. 그냥 평범한 날이었어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여기 와있네요.” 소은의 표정이 딱딱하게 응고됐다.
“난... 누가 죽였어.”
수민은 너무 놀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타... 타살이라는 거예요?”
“그래. 그래서 쉬지도 못하고 아직도 일하잖아. 그 새끼한테 복수하려고.”
“여기 온 사람들은 일단 지옥행은 면한 거라고 들었는데 복수 같은 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알 게 뭐야. 누구 말론 여기서 실컷 복수해도 천국 잘만 간다 그러고, 누군 그런 짓 하면 벌 받는다고 하더라. 결국엔 기둥 뒤에 가봐야 아는 거잖아? 살아 있을 때도 오지도 않는 미래 걱정만 하다 허무하게 죽었어. 다 죽은 마당에 또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 그 새끼 반드시 죽여서 지옥 보낼 거야. 다음 일은 그 담에 생각하지 뭐.”
수민은 소은이 교복만 입었지 말투는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밤 잠자리에 누운 수민은 반복되는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난 어떻게 죽었을까. 정훈이에게 결국 마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메시지를 전할 물건이라도 보내는 것이 나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죽었다는 걸 모르는 게 좋을 거야. 수민이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자 끽끽 오래된 매트리스가 우는 소리를 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물류센터의 불은 밤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날 잠이 다 깨지도 못한 채 출근한 수민은 연신 하품을 해대며 눈을 비볐다.
일찍 출근해서 줄을 서지 않으면 원치 않는 공정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수민이 아는 공정이라곤 환섭이 추천해 준 진열 밖에 없었기에 수민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와서 줄을 서 있었다. 덕분에 어제와 같은 공정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우유 박스처럼 생긴 플라스틱 상자를 카트에 가득 싣고 커다란 상품 도서관 같은 물류센터 구석구석을 누비며 크기에 맞게 진열을 반복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작고 날렵한 카트를 밀고 다니며 진열된 물건을 담는 사람들, 마트 입구에 겹겹이 쌓인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S자형 고리를 걸친 채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 어제도 보긴 했지만 죽은 첫날인 데다 관리자를 따라다니며 진열하는 법을 배우느라 상대적으로 덜 신경이 쓰였었는데 하루 했다고 일이 조금 익숙해졌는지 바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궁금한 게 많을 거야. 그렇지?”
인기척에 놀란 수민이 뒤를 돌아보자 환섭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라... 허허허 우리끼리 있을 땐 괜찮은데 관리자가 보면 한 소리 할 거야. 여기선 수평적인 사내문화로 님이라고 해야 된다나 뭐라나.”
수민은 되감기로 돌아간 장면처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연기를 했다.
“그럼 다시 할게요. 환섭 님 안녕하세요.”
“그려 수민 님. 허허.”
그때 수민과 환섭이 서 있던 라인으로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신생아 같은 아기를 업고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여자가 6단 선반 맨 꼭대기에 있는 물건을 꺼내서 카트에 담으려고 하자 뒤에 업혀 있는 신생아가 으앙 하며 울음을 터트린다. 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리는 여자는 물건을 얼른 다시 선반으로 되돌려 놓았다. 여자가 꼭대기보다 한 칸 아래의 물건을 꺼내서 카트에 넣었다. 아기는 잠잠했다.
“좀 지나갈게요.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요.”
여자가 수민과 환섭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물건을 찾아 옆라인으로 빠져나갔다.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환섭이 말했다.
“집품팀 혜미님이야. 손님에게 배달될 물건을 찾으러 오는 공정이지. 혼자 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보통은 갓난아기들과 2인 1조로 일을 해. 방금 지나간 사람은 혜미님이라고 아기 낳다 출혈이 안 멈춰서 죽었대나 봐. 등에 업고 다니는 애기는 세상빛 한 번 못 보고 뱃속에서 유산 됐다는데... 안 됐지 뭐야. 그래도 여기서 서로 의지하니 다행이지.”
수민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빨간색 유니폼 입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환섭의 말에 따르면 아빠가 아기를 업고 일하기도 하고 어린 학생들이 큰형이나 큰누나처럼 업고 다니기도 하는데 그래도 엄마와 아기팀이 가장 많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수민은 숫자를 세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쭈그려 앉아 물건 개수를 세고 있었다. 환섭은 소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인사했다.
“누군가 했더니 재고 조사팀의 태훈이구나.”
소년은 숫자 세는 걸 잠깐 멈추고 고개를 든다.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꾸벅 목례를 한다. 환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소년은 다시 처음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도 환섭의 설명은 계속되었는데 하얀 곱창밴드로 똥머리를 한 여자가 두 사람을 앞질렀다. 그녀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과장된 걸음을 걸었고,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본인에게 쏠리는지 끊임없이 확인을 해댔다.
“저 여자는 장미경. 앞 똑바로 안 보고 저렇게 걷다 교통사고로 죽었지.”
“저 친구는 포장팀의 조필국. 주식, 코인, 부동산 돈 된다는 재테크란 재테크는 다 했는데 졸부는커녕 투자개미로 흙바닥만 기어 다니다 화병 나서 죽었고.”
환섭과 직원식당에 도착한 수민. 물류센터가 워낙 커서 수민 같은 신입들은 혼자 직원 식당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환섭 님. 맛있게 드세요.” 은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줄안경을 낀 중년여자가 환섭에게 인사하며 지나갔다.
“저 사람은 전산에 물건 등록하는 입고팀 관리자 최희숙. 하나 있는 아들놈이 취업도 안되고 결혼도 못하고 인생이 꼬일 데로 꼬였나 봐. 죽어서도 아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못 가고 있지 뭐.”
수민은 이제 머리가 어지러웠다. 매일 새벽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택배, 그걸 보내기 위해 불이 꺼지지 않는 물류센터, 그 안의 수많은 공정들, 그리고 죽어서도 일하고 싶어 하는 이 많은 사람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모두 다 다른 이유로, 남기고 온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 머물고 있지. 나도 수민이도 우리 모두. 늙은이가 말이 많았구먼 오늘은 이쯤 하자고.”
말을 끝낸 환섭은 뜨끈한 국에 밥을 모두 말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수민도 얼른 수저를 들어 본다. 다른 사람들은 식당 짬밥 맛없다며 국그릇에 밥과 반찬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버리러 가는데 아직 신입이라 그런가 수민에겐 꼬박 하루 만에 먹는 밥이 꿀맛이었다. 윤기 나는 쌀밥에 뜨끈한 소고기뭇국, 어육보다는 밀가루 함량이 높아 보이는 어묵볶음과 조금만 먹도록 짜게 만든 미역줄기볶음 그리고 김치. 한국 사람은 밥심이라는 어른들 말이 맞나 보다. 밥 한 끼에 몸이 후끈하고 덥혀지고 그 열기가 죽은 자신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해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가 죽은 게 맞을까? 이렇게 생생한데. 당장이라도 지구 여기저기를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훈이에게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싹 비워진 식판을 앞에 두고 배를 두들기는 환섭과 수민. 살아 있을 때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먹었기 때문에 괜찮다며 극구 사양해도 환섭은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수민에게 내밀었다.
“일하는 사람한텐 이런 게 낙이여.”
“감사합니다.” 수민은 환섭이 주는 따뜻함에 씨익 웃으며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았다.
“사원님들 B구역하고 D구역은 물건 넣을 자리가 부족하니 오후 근무 때는 C구역에서 작업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열팀 관리자는 점심시간 직후 간단한 공지를 전달했다. 환섭과 수민은 물건이 가득 실린 카트를 들고 C구역에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요?”
“응?”
“할아버지 얘길 못 들었잖아요. 왜 남기로 하셨어요?”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선택(Choice)의 연속이라는 말 들어봤나? 나도 살아있을 때 티브이에서 본거야.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C구역이 바로 그 선택이겠구먼.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죽어서도 끝이 아니라 이런 선택의 연속이 기다리고 있었단 걸. 죽으면 그만이지 타령 말고 조금 더 신중할걸. 나는 살아생전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어. 그런 내가 유일하게 잘한 선택이 있다면 딱 하나야.”
“그게 뭔데요?”
“우리 할멈을 만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