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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Oct 23. 2024

적을 두다

2화

운명은 작은 우연들의 집합체라고 한다. 하나의 운명을 만드는 데 나로부터 발현된 의지 한 조각과 타인 또는 상황으로부터 발생된 변수의 조각들이 쓰인다. 기적 같은 서사에 영원할 것 같던 운명은 시간이 지나면 시절인연이라는 조각이 된다. 이는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순리다. 시간의 권력 앞에 상황은 변하고, 사람은 오가고, 감정과 생각은 여러 차례 드나들기 마련이다. 가장 작은 조각이던 우연이 자라 운명이 되고, 그것이 사그라들어 인연이라는 이름의 흔적으로 남는다. 고로, 무수한 시절인연들은 운명이 스치고 간 흔적이겠다.


나를 관악으로 이끈 것 역시 작은 우연들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거주지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나의 거주지 조건은 첫째, 서울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 둘째, 집세를 홑벌이로 충당할 수 있으며 셋째, 또래가 많이 거주하여 활발하지만 시끄럽지 않은 곳이었다. 이 세 가지 요소에 얼추 들어맞겠다 싶어 찾은 곳이 관악구였지만 처음은 반신반의였다. 그러다 우연히 들린 샤로수길의 태국 음식점에서 눈이 휘둥그레지게 맛있는 똠얌꿍 한 그릇을 먹은 순간 “아, 이곳이구나.”했다. 우습지만 때론 이렇게 별것 아닌 핑계가 결정에 크게 기여한다. 애석하게도 그 음식점은 내가 이사를 오고 일주일 후 사라졌다. 운명의 장난도 너무하시지.


나는 서울대입구역을 중심으로 걸어서 최대 15분 거리의 세 군데의 동네에 살았다. 처음은 서울대입구역과 봉천역 사이, 다음은 서울대입구역과 낙성대역 사이, 그리고 현재 숭실대입구역 방향의 동네에 거주 중이다. 지난 6년여 간 근무지까지 도보로 출퇴근을 했으니 이 동선을 모두 합치면 서울대입구역의 동서남북을 모두 겪은 셈이다. 이 동네는 길 고양이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이에게 먼저 다가와 헤드번팅을 건네고 무릎에 앉아 골골송을 열창한다. 그에 부응하듯 사람들은 골목 한편에 스티로폼으로 집을 만들어 비나 눈이 오면 천막을 쳐주고 수시로 츄르를 대령한다. 동물 친화적인 동네가 사람에게 차가울 리 없다는 지론으로 난 이곳에 눌러앉았다.


이곳 동네엔 골목마다 작은 가게들이 참 많다. 퍼푸치노가 있는 반려동물 동반 카페,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서점, 그 둘을 합친 북 카페, 사장의 취향이 잔뜩 묻어있는 와인숍, 혼술에 안성맞춤인 바, 무인 편집숍, 그리고 각종 공방들까지. 이들의 업종은 모두 달랐지만 분위기엔 일관성이 있다.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이는 고객이기보단 동네 주민, 혹은 잠정적 친구라는 점이다. 손님과 직원, 손님과 손님, 심지어 그들의 강아지끼리도 자연스레 한시적 친구가 돼버린다. 개인주의가 당연시되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거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다. 생면부지였던 낯선 이가 지인이 되고, 이 지인이 친구가 돼버리는 동네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냔 말이다. 이런 마음을 두고 “적을 둔다”라는 건가 싶었다. 이 생경한 소속감에 취해 나는 오늘도 관악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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