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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크어버드 Aug 19. 2020

나도 시골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덧 사업을 시작한 지도 시간이 지나고 단골손님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한 번 오는 여행지에 웬 단골손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공간이 좋아서 또는 우리를 보러 재방문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 남는 손님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연어남'이다. 게스트하우스 오픈 초반이었던 7월 7일에 중저음의 보이스로 한 남자분께 예약 문의가 왔다.


“2박 3일간 머무를 예정인데 혹시 아무것도 안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괜찮나요?”


청소 시간에 잠시 객실만 비워 주시면 괜찮다고 편안하게 이용하시라고 예약 안내를 드렸다. 예약 날이 되자, 덩치 좋고 수더분한 모습의 한 남성이 화장실 휴지 한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혹시나 택배 시킨 게 있나 고민하던 찰나에 체크인은 어떻게 하냐며 물어보셔서 아차 손님이구나! 싶었다. 선물이라며 갑자기 휴지를 불쑥 내미셨는데 오픈 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아 집들이 선물로 들고 왔다고 한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아무 목적 없는 호의를 받아본 게 언제였을까? 그것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이런 친절을 받으니 너무 놀라웠다.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에 살다 보니 타인의 낯선 친절에 순간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날 휴지를 들고 온 손님과는 각별한 사이가 됐는데 별명을 '연어남'이라고 지어줬다.


연어형은 서울 토박이인 관계로 시골에 고향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자기에게도 시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 생애 첫 혼자 여행을 떠나려다가 우연히 우리 공간을 보고 방문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뒤로 여유가 생길 때마다 한 마리 연어처럼 고향 집(게스트하우스)에 찾아오곤 했는데 마침 연어 수입회사에서 일하던 터라 올 때마다 맛있는 훈제연어와 샐러드를 들고 왔다. 연어형이 오는 날엔 연어샐러드에 와인을 곁들이며 서로 사는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다른 손님들과 합석도 하여 즐겁게 지내는 등 나중엔 손님이 아닌 듬직한 형이 되어줬다.


그런 '연어남'과 각별한 사이가 된(같은 날 숙박한) 멤버 중엔 오렌지주스를 사랑하는 '아산 청년'이 있다. 고속도로보단 국도를 좋아하고 아날로그 감성 가득한 묵호를 좋아해 이 공간의 최다 방문 고객이 됐는데 아산에서 동해까지 머나먼 국도를 달려 2년간 20번 가까이 방문해준 정말 고마운 손님이다. 매달 한 번씩은 온 것 같은데 해맑은 웃음에 가끔 한 번씩 나오는 충청도 사투리가 너무나 매력적인 남자다. 공교롭게 이 두 남자가 같은 날 방문해서 친해지게 됐고 이런 우연한 만남과 모임이 자칫하면 외로울 수 있는 타지 생활에 큰 힘이 됐다.


연어형의 2박 3일 마지막 날, 첫날의 휴지 감동에 보답하기 위해 가게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마침 그날 가게 벽에 벽화를 그려주려 온 친구네 부부가 온 터라 함께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친구가 준비한 대게 안주에 오일장에서 사 온 부침개와 맥주를 더 하니 제법 흥이 났다. 즐거운 식사 시간 중 다른 게스트들도 하나둘씩 숙소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한 명 두 명 모이다 모두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됐다. 이제 막 20살이 된 대학생부터, 아산 청년, 연어남까지 개개인만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인데 한자리에 모이니 독특한 케미를 만들어내는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동해산 백골뱅이와 멀리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훈제연어 한 상
처음 만난 사람과도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묵호항의 야경

게스트하우스에서 여행자 간의 만남이 생기는 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사실 그 설렘의 관계가 일상으로 복귀한 후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모임을 이끌어 가야만 가능한 일인데 그날 만난 분들은 붙임성 좋은 연어형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나중엔 그 패밀리가 숙소 전체 예약을 하고 우리 부부와 함께 바닷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다. 우리가 동해를 떠날 때 가장 아쉬워하며 마지막까지 이곳을 찾아준 사람들이기도 한데 도시로 다시 돌아오는 결정을 할 때 패밀리에 대한 미안함이 우리를 많이 망설이게 한 게 사실이다.


비록 연어남에게 고향을 남겨주진 못 했지만 좋은 추억을 남겨준 거로 그 미안함을 대신하려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선 이처럼 게스트 간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때로는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타인에게 더 솔직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점점 사회에 찌들어가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었는데 이 곳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으로부터 잊고 있던 세상의 따뜻함을 정말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때론 더 각박해져만 가는 사회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지만, 여행지에서만큼은 누군가의 작은 친절이 더 큰 친절로 돌아가고 한 명 한 명의 인연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고향이 없는 수많은 서울 사람들에게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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