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오렌지
( 여러나라의 비참과 치욕 https://brunch.co.kr/@sonsson/27 )
미국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많은 경우를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였고, 자신이 참여한 거의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였다. 내가 원하는 바를 내가 정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나의 방식으로 내가 달성하겠다는 마이웨이의 승리였다.
미국에게도 몇몇의 경쟁자들이 있었다. 출발의 모태가 되었던 영국, 서부로의 확대에 걸림목이던 멕시코, 대양을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늙은 스페인, 일본의 뜬금없는 도발, 지구를 양분하였던 북극곰 소련. 미국은 그들 모두를 박살내거나 눌러 앉히거나 분열시켜버리고 최후의 강대한 제국이 되었다.
1513년 스페인의 플로리다 상륙으로부터 500년, 1776년 영국에서 독립으로부터 채 250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 안에 미국은 지상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제3세계의 사람들이 풍요의 제국으로 탈출하기를 갈망하였던가?
유럽에서 건너온 콜럼부스의 후예들이 오래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을 속이고, 배반하고, 쫓아내고, 학살하고, 억압하는 과정을 거쳐 미국은 탄생하였다. 미국은 그 출발부터 스페인과 프랑스와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 식민지의 어둡고 축축함에서 일어난 제국은 고귀함과 고상함과 명예로움의 역사를 앞에 내세우며 논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비참함을 출발 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부스가 "구세주의 섬"(산 살바도르)을 발견한 이후 20년이 되는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후안 폰세 데 레온이 "꽃의 대지"(라 플로리다)에 도착함으로써 유럽인들은 최초로 미국의 영토에 발을 딛게 된다. 1565년에는 플로리다의 세인트오거스틴에 최초의 영구적인 유럽인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한편 1534년 프랑스의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강과 오대호를 탐험한 이후로 100여년이 넘는 기간을 거치며 허드슨만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는 미국의 중앙부에 누벨 프랑스라는 식민지가 형성되었다.
1607년 제임스타운에 영국인에 의한 최초의 정착지가 만들어지고, 1614년부터 네덜란드의 이주민들은 맨하튼 섬의 뉴암스테르담 인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600년대부터 미국 독립 이전까지 약 5만명의 영국 죄수들이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기도 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죄수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후예들, 프랑스의 위그노, 아프리카 혹은 중남미를 거쳐 다시 끌려온 흑인들, 서부로 쫓기고 있던 원주민들에 의해 미국의 역사는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뉴암스테르담은 수 차례에 걸친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에 따라 뉴욕에서 뉴오렌지로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개명되었고 최종적으로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 1770년대 아메리카 식민지의 인구는 원주민을 제외하고도 영국 본토의 1/3수준이었고, 본국에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음에도 의회에 대표자를 보낼 수 없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보스턴 차 사건 등을 계기로 미국독립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대륙군이 창설되고, 조지 워싱턴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7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며 이 날은 이후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된다.
1781년, 사사건건 영국과 충돌하던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미국-프랑스 연합 군대 약 2만명이 요크타운에서 약 1만명의 영국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게 되고, 전쟁은 식민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식민지 자치정부의 주권을 승인하게 되었다. 1789년 미국 헌법이 비준되고,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였으며,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으나 1790년 필라델피아로 옮겨지고 1800년 다시 워싱턴 D.C.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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