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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불태우다

프랑스의 이이제이

by 하얀돌

( 여러나라의 비참과 치욕 https://brunch.co.kr/@sonsson/27 )


미국은 200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루었다. 폭주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아메리카 제국은 전혀 실패의 쓰라림을 겪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론 당연히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독립전쟁의 결정적 장면이던 1781년 요크타운 전쟁의 승리마저도, 영국에 관한한 불구대천의 원수인 프랑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구대륙 프랑스의 이이제이 전략에 힘입어 신생국 미국은 운좋게 영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인 1812년 미국은 다시 한번 식민 모국이었던 영국과 전쟁을 치루게 된다. 영국령 아메리카였던 캐나다에 대해 미국의 선공이 이뤄졌고 토론토도 점령하게 되지만 5천명도 안되는 미군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신생국의 역량으로는 원래 프랑스 영토였고 당시는 영국의 지배에 놓여있던 몽레알까지 도달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움츠리고 있던 영국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틈을 이용해서 미국의 오만방자에 대해 반격에 나서게 되고, 블래든스버그 전투를 통해 승기를 잡게 된다. 영국의 군대는 어렵지 않게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점령하고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불태워버렸다.


몇 번의 뒤치락 끝에 겐트에서 조약을 체결한 양국은 서로간 이익도 손해도 없는 타협을 보게 되지만, 미국으로서는 국가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맞게 되었다. 전쟁에서는 영원한 승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례였다.


1857년 미연방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이라는 세기적 재판에서 7대2의 결정으로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 로저 토니가 작성한 판결문에 따르면 노예로서 미국에 들어온 흑인과 그 후손은 그가 노예든 노예가 아니든 미국 헌법으로 보호될 수 없고, 미국 시민이 아니기에 미국 법원에 제소할 권리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연방정부가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하고, 타당한 법적절차 없이 주인으로부터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미국 대법원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이 판결은 인간의 천부인권적 가치에 대한 무시와 인류의 보편적 관념을 거부하였고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연방내에서 양분되어 있던 노예주와 자유주의 갈등을 폭발시키게 되었다.


노예제도의 존속과 폐지에 대한 대립,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힘의 갈등 등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에 빠져들게 된다.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합중국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미약했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주정부의 자체적인 권한도 강하였고, 상대적으로 연방정부가 주정부를 통제할 수단도 많지 않았다.


1860년 링컨의 대통령 당선으로 노예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주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연방정부의 간섭을 우려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남부의 7개주들은 1861년초까지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는데, 헌법상으로는 이러한 탈퇴가 불법이라고 할 근거가 없었다.


초기에 이탈한 7개주와 시간이 지나면서 추가로 이에 참여한 4개주들은 북미 대륙의 남부에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수립하고, 기존의 아메리카 합중국의 헌법이야말로 각 주가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스스로 폐기를 결정할 수 있는 협정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북부와 서부의 23개주는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남았으며 남부주들의 탈퇴를 반역이라고 규정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최후의 근대전이자 최초의 현대전이라 불리웠으며, 산업혁명과 기술발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무기와 장비들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무기가 강력해짐에 따라 전쟁에 참여하는 인명의 피해도 필연적으로 대규모적이되었다. 윌리엄 셔먼 장군의 북부군은 조지아의 주요도시들을 초토화하며 무자비한 전진을 진행했다.


남북의 내전으로 100만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의 조사에 따르면 13~43세 백인 남자 전체의 8%가 전쟁으로 사망했다고하며, 특히 남부연합의 경우 그 수치가 18%나 되었다고 한다. 남부군 패배 이후 재건기간을 거치는 동안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고 연방의 결속이 단단해지는 효과가 있었다고는하지만, 내부 분열을 통해 언제든지 연방이 붕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도 분명해졌다.


2차대전의 승리로 이룩한 유아독존의 자신감은 코리안 반도에서 별다른 수확 없이 끝난 무승부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1964년 자작극이라고 알려진 통킹만 사건으로 참전하여, 10여년간 2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베트남전쟁에서는, 외형상 파리평화협정 체결로 전쟁이 종료되었지만, 실질적 의미에서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대규모 전쟁에서 연이어 부진한 성과를 올리게 되고, 이전과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에게 항상 승리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님이 드러났다. 아메리카 제국은 지속적으로 무력 사용이 필요한 사태를 만들어 내고, 무력 사용이 필요한 사태에 개입하고, 직간접적으로 무력 사용을 실행하였지만, 이후로는 승리 뿐만 아니라 전술적 혹은 전략적 패배와 무승부도 함께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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