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운명
( 여러나라의 비참과 치욕 https://brunch.co.kr/@sonsson/27 )
신생국으로 출발한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대륙의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원주민들과의 분쟁이 일어나고, 합중국의 인디언 제거정책에 따라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동반하며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밀려났다.
1803년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독립 당시 13개주의 영토 크기에 맞먹는 거대한 루이지애나를 1500만달러에 매입하게 된다. 미국 정부의 파견단은 애초에 누벨 오를레앙즈(뉴올리언스)의 통상권 등만 협상할 예정이었으나, 프랑스 측의 역제안으로 단돈 1500만불로 한반도의 10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는 프랑스가 당시 겪고 있던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나폴레옹 전쟁과 아이티 혁명 등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미국으로서는 밤길을 걸어가다 횡재를 맞았다고 할만한 사건이었다.
미국 군대가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지속적인 침입과 요구에 따라 미국과 스페인은 1819년 애덤스-오니스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미국은 플로리다와 멕스코 만 연안의 영토를 할양받고 스페인은 미국으로부터 500만불과 함께 양국간 분명한 국경선을 확약받게 되었다. 1845년 미국은, 이미 1837년에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상태에서 미국과의 합병을 원하고 있던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이 당시부터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론이 유행하였다. 이는 미국이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었으니, 영토 팽창주의와 약탈을 신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신화적 경지에 이르는 신념이었다.
미국의 맹신적 확장주의가 캐나다의 태평양쪽 영토를 모두 흡수하겠다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54도 40분이 아니면 전쟁"(54°40' or Fight)이었다. 북위 54도 40분은 알래스카의 남단 끝자락이었고, 이 지점에서부터 태평양을 따라 남쪽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오리건 지역에 대해서는 영국, 미국, 러시아, 스페인이 소유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자들이 탈락하고 미국과 영국만이 남아 이 지역을 공동 관리하게 되지만, 당연하게도 서로간의 대립은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북미대륙의 태평양 해안쪽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의 숙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 합병으로 멕시코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과 새로운 전선을 넓히기가 어려웠고,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게 된다. 북위 54°40' 선을 주장한 미국과 북위 42°선을 주장한 영국은 북위 49°선에서 타협 하게 되고 이는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국경이 되었다. 49도 이남으로 일부 연결된 밴쿠버 섬을 미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과격파의 주장도 있었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과의 타협을 위해 밴쿠버 섬 전체를 영국의 지역으로 인정하고 미국은 북동부 지역의 국경선을 정리하게 된다.
또한 텍사스를 합병한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북태평양 남단의 출구로서 캘리포니아까지 멕시코로부터 쟁취해야 된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제기하고 있었다. 미국의 지속적인 자극에 따라 1846년 4월 25일 미국과 멕시코의 양군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미국은 20여명 수준의 희생을 핑계로 선전포고를 하며 침공을 개시하게 된다. 멕시코는 당연하게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충돌을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국경 부근에서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미군은 개전과 함께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공격를 개시했다. 멕시코군은 여러 부분에서 미군에 상대가 되기 어려웠고, 차근차근 준비된 미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없었으며, 북서부 지역의 국경방위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미국은 캘리포니아 지역의 공격에도 나서, 해군함을 통해 군대를 상륙시키고 로스 앙헬레스를 포위 공격하였으며 멕시코군의 반격을 물리쳤다.
1847년초에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정적이었다. 이후로도 항복하지 않고 버티는 멕시코를 압박하기 위해 미군은 적국의 중심부로 공세를 이어갔다. 미국은 우월한 해군 전력을 활용하여 멕시코만 연안의 최대항이자 과거 스페인 정복자들이 들어왔던 베라크루스에 지상군을 상륙시키고 멕시코시티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847년 9월 15일 미군에 의해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함락되었고, 멕시코 정부는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된다.
계속되는 치명적인 참패로 멕시코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항복과 다름없는 협상을 제의하게 되고, 1848년 2월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을 체결하며 미국과 멕시코 양국은 전쟁을 끝내게 된다. 멕시코는 텍사스가 미연방에 합류하게 됨을 공식 인정하고, 서부 지역의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멕시코는 1,500만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뉴멕시코, 애리조나, 콜라라도, 와이오밍, 캔자스, 오클라호마 등의 거대한 지역을 미국에 넘기게 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현재 미국 본토의 모습을 거의 완성하게 되고 이후 거대한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단, 이 전쟁에 대해서는 미국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으니, 링컨은 이미 수 백년 동안 멕시코의 영토였던 곳을 전쟁으로 빼앗는 것이야말로 약소국에 대한 횡포라고 하였다. 1853년에는 멕시코 주재 미국대사 제임스 개즈던을 통해 1천만불을 지급하고 멕시코로부터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남부 지역을 매입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의 확장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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