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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Mar 06. 2023

그 좋은 공무원을 왜 그만두고 싶냐면;

퇴사병에 걸린 공무원을 위한 변명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반년이 지났다.

품속에 사직서 한번 안 품어본 직장인이 어디 있을까 마는.


예전에는 민원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일이 몰려서 내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할 때 '아, 돈 벌기 힘들다. 다 때려치고 싶다.'라고 투정 부리듯 말해본 적은 있었지만 진짜로 내가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공무원은 말 그대로 철밥통, 평생직장이었으니까.


교육행정직은 2년마다 발령지를 옮기는데 새로 옮긴 곳에서 내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직무를 맡게 되었고,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겼으며, 교육행정직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지속적인 업무과중이 이어지면서

'이 일을 평생 하긴 어렵겠구나.' 하는 처음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워라밸과 안정된 삶을 꿈꾸고, 그러다 보니 4시 반에 퇴근을 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요즘 특히 더 인기가 많아졌다 한다.


시청, 구청, 주민센터 등에서 근무하는 일반행정직에 비해서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교육행정직은 아무래도 직접 민원인을 상대할 일도 적고, 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뭔가 익숙하고도 안락한 이미지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10년 이상의 경력이 쌓여 학교행정실 업무에는 도가 트고 숙련된 기술자인데도 그만두고 싶어 몸부림치는 걸까.



우선은 (14년 경력자도 능숙하지 않은 낯선) 업무의 과중.


학교행정실은 외부인들 생각하는 것처럼 여유롭지 않다.

어쩌다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교근무자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며 빵을 뜯으며 하하 호호하는 모습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아니다.

(학교에 따라선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고 널럴한 학교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 또한 케바케. 학교바이학교다.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의 경험담이지만, 교육청에서 근무할 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다가 2번이나 신우신염에 걸려 열이 펄펄 끓었지만 일이 많아서 새벽에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병가 하루 쉬지 못하고 출근하기도 했고.

어떤 학교에선 며칠씩 밤이 늦도록 초과근무를 해도 회계마감까지 처리를 못해서 또 며칠간 집에서 새벽 3,4시까지 일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곳에선 감사 준비를 하느라 초과근무를 했는데 자정이 넘고 너무 늦어서 집에 못 가고 여교사휴게실에서 잠을 자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어느 직장이 얼마나 힘드냐 배틀하는거 아니니까 이정도만 적겠다. 교행직은 여유롭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학교는 1년 단위로 매 시기 비슷한 행사들이 있고, 매달 비슷한 루틴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기도 하지만 학교마다 변수가 많고, 사안도 많이 다르다.


어떤 학교는 너무 역사와 전통이 깊어서 학교시설이 금방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인 곳도 있고.

어떤 학교는 학교 주변 주민들과 토지 경계를 두고 몇 년에 걸쳐 소송을 하고 분쟁하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갑자기 옥상에서 노후된 배관이 터져서 학교 전체가 물난리가 나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빌런 직원이 있어서 그 직원의 업무를 다른 직원들이 땜빵을 하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뒷산에서 뱀이 내려와 화단에 숨어들었다가 학교건물로 들어와 난리가 나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혁신사업이 많아서 지자체 보조금이 수십 건씩 교부되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급식실 현대화공사를 하기도 하고, 석면해체작업을 하기도 하고, 체육관 증축공사를 하기도 하고, 화장실 리모델링공사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교는 이 모든 걸 다하기도 한다.


나는 14년 가까이 교육행정직으로 근무를 해왔지만 아직도 새로운 일이 계속 생기고 있고, 언제나 그렇듯 법이 먼저 바뀌고 교육청에선 아무런 인력지원도, 교육도, 지침도 없이 '학교장 재량. 학교에서 알아서'를 모토로 업무를 시달하며 '위반 시 벌금 얼마, 과태료 얼마, 주의 경고 처분 가능' 등으로 압박을 하고 '다른 학교들은 다 하는데 왜 너네만 못해?' 라거나 '전임자는 했던 건데 왜 너는 못해?'라고하며, 나 스스로 '내가 잘못인가?' 생각하게끔 가스라이팅을 한다.


요즘은 내가 행정직인지 시설관리직인지 헷갈릴 정도로 시설업무를 많이 해야 하는 분위기도 나의 의욕상실에 한몫하고 있다.


교육청에서 몇 년 전부터 시설관리직을 신규채용하지 않고, 점점 학교에서 감원하는 추세라 관내 학교의 40% 정도는 시설관리직이 미배치 되어있다.


학교라는 커다란 시설 안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안전을 책임지는 곳인데도 전문적인 시설관리 인력이 없는 학교들이 수두룩하고 나 같은 교육행정직들이 교육 몇 시간 듣고 자격을 얻어서 관리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항상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소방안전관리자, 가스안전관리자, 승강기안전관리자, 어린이놀이시설관리자 등등등. 다 내꺼)


(2020년에 있었던 행정실장 감전사고에 관한 프레시안 기사를 링크로 첨부한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22210422580996 )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자리: 행정실장



교사들이나 교육공무직들은 인원도 많고 노조도 잘 되어있어서 그런 일이 생기면 '그걸 왜 우리가 해?!' 하면서 노조차원에서 대응도 잘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일을 시켜야 할 때 교육청에서 눈치를 많이 보는데,

행정직은 쪽수도 안되고, 노조도 힘이 없어서인지 매번 모든 정책의 희생자가 되는 것 같은 피해의식이 자꾸 생긴다.


교사들은 교육에 집중해야 하니까 행정업무는 행정실에서 전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식의 확산도 교행직으로서는 힘 빠지는 일이고(인력충원은 없는데 업무는 계속 넘어오니까) 공무직 노조에선 '공무직들에게 이러이러한 업무는 시키면 안 된다.'는 공문을 계속 보내는 상황인데 그 중간에 끼어있다 보니 가끔은 '우리가 봉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보니 자꾸 억울해지고 의욕이 사라지게 된다.


(교사나 공무직에 대한 악감정은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는 교사들이 학생교육에 집중하는 게 맞다는 의견에도 동의하고 그간 공무직들이 학교에서 관행적으로 허드렛일을 많이 맡아왔던 것도 알고 있기에 개선의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업무가 교육행정직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재미로 직장 생활하는 건 아니지만) 일이 너무 재미가 없다.


초창기 때는 일을 너무 모르다가 차츰차츰 경력이 쌓이면서 일의 재미를 느끼는 시기가 분명히 온다.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교육청으로 발령이 나서 또래 팀원들과 으싸으싸 하며 즐겁게 일하던 시절도 있었다.


경력이 쌓이고 직급도 올라가면서 나는 교육청 팀원이 아니고 행정실 직원이 아니고 교육청 팀장이나 행정실장이 되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아무리 친하고 편하게 지내도 주무관과 행정실장은 위치가 다르고 맡은 역할도 다르다.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좋은 관계로 지내더라도 일이 생기면 업무분장을 해야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을 해야 하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 일은 정말 열심히 잘할 수 있는데, 중간에서 업무와 직장 내 인간관계 등을 조절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행정실장의 자리는 실무자이기보다는 교장의 비서(?) 역할을 하게 되는 비중이 더 높아지기도 하면서 업무의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여러 가지에 치여서 지치는 일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교육행정직의 업무성격이 아무래도 교육활동의 '지원'이다 보니까 일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선생님들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고 보조하는 역할로, 학생들의 원활한 학교생활을 지원하는 역할로.


'감사합니다~'라는 소리에 의미를 두고 뿌듯해하는 것도 1,2년이지 이제는 그 정도로는 내 직업으로 느낄 수 있는 보람이 없었다.


매일매일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출근길이 고역이고 꾸역꾸역 시간 맞춰 출근해서 할 일만 꾸역꾸역 하다가 퇴근하는 일상.


그리고 이런 삶이 정년까지 보장된다는 게 과연 행복일까.


내 인생은 너무너무 재미가 없는데,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전혀 행복하지가 않은데 안정적이라는 이유하나로,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하나로 내 남은 인생을 이곳에 묻어둬도 되는 것일까.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우울했다.


간절하게 공무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수백수천일 텐데 너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랬다. 보람을 느낄 수 없고, 이 일이 너무 재미없고, 이렇게 의욕 없이 사는 내 모습이 슬펐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누군가 말했다. 지금 그만두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그래. 물론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겠지.(공무원 동기들이 연금 받을 때 즈음?)

하지만 그만두지 못하고 여기 있으면 내내 후회할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무원 공부한다고 시간을 허비했는지 후회하고 있다.


'더 어릴 때, 더 젊을 때 더 많은 일을 경험해 볼걸. 실패할까 걱정 말고 이것저것 해볼걸.' 하고 매일매일 후회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것 또한 내가 10년 이상 공무원생활을 하고서야 느끼게 된 것이므로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202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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