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PD 에세이
2019.12.15
내가 운영하고 있는 오픈 채팅방 <독한PD 영상촬영편집 클래스>에 계신 한미경님이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하루 종일 책을 쓰느라 힘들다는 톡을 보게 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톡을 보냈다.
"한미경님의 책 쓰시는 모습을 셀카로 담아보세요. 그리고 아이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서서 오늘 글 쓰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이야기하세요! 오늘은 잘 안 써져서 힘들었다. 오늘은 잘 써져서 기분이 좋다. 매일매일 영상일기를 (유튜브에) 올리세요~ 나중에 출판 기념회 때 그 영상들을 같이 틀어주면 어떨까요? "
나는 12년 동안 방송 제작 프로그램 PD로 일을 해왔다. 주로 교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는 PD는 주인공의 일상을 세심히 관찰한다.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주인공의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일상을 며칠에 걸쳐 같은 씬을 반복해서 촬영하기도 한다.
글은 읽음으로써 상상하고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영상은 이미지가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며 당시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글만이 기록이 아니라 영상도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일상을 꾸준히 영상으로 기록하고 그게 쌓이면 나만의 다큐멘터리가 되는 것이다. 꼭 방송 PD들이 촬영하고 편집해야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평범한 내 일상을 담으면 그게 기록이고 다큐멘터리다. 하루에 나랑 연관된 모든 것들이 나의 다큐멘터리 소재가 될 수 있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일하는 행위,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 지나가는 풍경... 그리고 내가 하는 말들...
나는 3년 전에 번아웃 증후군이 와서 다니던 제작사도 그만두고 홀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번아웃이란 '타버리다' , '소진하다'라는 뜻으로 번아웃증후군은 로켓의 연료가 소진되듯 극도의 피로와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는 증상을 말한다. 과도한 업무량, 학습량, 야근 등으로 현대인들을 지치게 한다. 이런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흥미 저하, 의욕상실, 슬럼프, 무기력함, 극도의 피로감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번아웃 상태란다.
당시 방송일에 뛰어들어 일한 지 10년. 조연출 때부터 쉬지 않고 달려왔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른 프로그램으로 마음 편하게 쉬지 않고 일만 했었다. 쉬는 법조차 모르며 살아온 나였다.
' 나는 왜 영상일을 왜 선택했는가?'
'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원론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짐을 싸고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매일매일 걷는 일상이 시작됐다. 자연을 보고 생각하고 걷고...
하지만 34일 동안 780Km(부산에서 신의주 거리)를 걸으며 영상으로 담아두지 않을 걸 굉장히 후회하고 있다. 매일매일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기록해두어서 다행이지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당시에는 일에 너무 지쳐서 카메라 보는 것 자체가 싫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영상 촬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 길을 걷고 있는 '나'를 기록했더라면 어땠을까?
힘들게 걸으면서 내가 했던 말들과 풍경을 영상으로 실감 나게 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같이 공존한다. 그 슬픔까지도 내 인생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힘듦과 어려움도 같이 사랑해주어야 비로소 내 인생이 완성된다. 물론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내 인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힘듦과 어려움을 영상으로 기록했더라면 지금 그 영상을 보면서 나는 미소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상을 가지고 콘텐츠를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했을 것이다. 내가 힘들었을 때 이렇게 이겨냈노라고.
한미경님도 출판 계약을 하고 하루 종일 책 쓰는 일상 또한 한미경님의 인생이고 삶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쓰며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영상 일기로 담으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출판기념회 때 그 기록했던 영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기분이 더 남다르지 않을까?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 기록했던 영상이 있기에 또 다시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어렸을 적 일기장을 꺼내 보면 된다. 그 일기장은 '유튜브'에 잘 보관되어 있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번 더 걸을 계획이 있다. 그때는 애증의 카메라를 다시 들고 순례자 '이승용'의 일상을 기록할 것이다.
나는 '영상'이 가진 위대한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