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천하 통일 위업의 비결 ‘객경’
* 객경(客卿) ― 외국 출신의 고위 관료
진(秦)나라의 출발은 보잘것없었다. 전국 7웅을 자처하던 제나라, 위나라가 기세를 떨칠 때도 변방의 작은 소국에 머물렀다. 서쪽 변두리에 자리한 탓에 중원의 제후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런 진나라가 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객경(客卿)’이라는 파격적인 인재정책에 있었다.
객경은 다른 나라에서 온 고급관리로 정식 벼슬이라기보다 자문관에 가까웠다. 진나라에는 객경이 넘쳐났다. 대부분 나라가 자국의 인재만 기용할 때 국경을 활짝 열고 외국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한 셈이다.
객경을 대표하는 인물에는 초나라 출신 이사(李斯)와 위나라 출신 상앙(商鞅, 흔히 ‘공손앙’으로 불린다)이 있다. 이사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진나라의 모든 개혁을 주도했다. 화폐단위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그였다. 상앙은 효공(孝公)의 신임을 받아 법령과 제도를 개혁했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법치주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진나라를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물론 천하 통일의 초석을 닦았다.
객경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진 목공(穆公)이었다. 목공은 진나라가 궁벽한 곳에 자리한 탓에 중원의 선진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 해법으로 시행한 것이 ‘인재를 뽑을 때 네 가지를 묻지 않겠다’라는 ‘사불문(四不問)’이었다. 네 가지란 민족·국적·신분·나이를 말하는데, 능력만 있다면 그것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 기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사불문 시행은 성공적이었다. 변방의 오랑캐로 불리던 진나라가 중원의 패자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일약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또한, 진나라 인재정책의 근간이 되어 400년 후 천하 통일을 이루는 핵심 역량으로 작용했다.
한나라에 정국(鄭國)이라는 물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었다. 진왕(秦王, 진시황) 원년, 한나라는 그를 사신으로 파견해 3백 리에 이르는 대규모 수로 공사를 제안한다. 진의 재정을 탕진해서 국력을 약화하려는 계략이었다. 진나라를 피로하게 하는 계책, 일명 ‘피진계(疲秦計)’였다. 하지만 공사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음모가 그만 드러나고 말았다. 진노한 진나라 대신들은 그를 즉시 처형하라고 왕에게 간언했다.
“정국은 겉으로는 진나라를 섬기는 척하지만, 첩자임이 분명합니다. 즉시 그를 처형하십시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진나라 인재정책의 근간이 되었던 ‘객경’ 역시 폐지될 위기에 처했다. 외국 인재들에게 자리를 뺏긴 대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축객령(逐客令, 외국인 벼슬아치를 추방하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시황은 모든 외국 인재를 즉시 해고한다고 선언했다.
초나라 출신 이사(李斯) 역시 축출 대상에 포함되었다. 하루아침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그는 목숨을 걸고 축객령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린다. 〈간축객서(諫逐客書)〉가 바로 그것이다.
반드시 진에서 나는 것이어야 한다면 정(鄭)나라와 위나라 여자를 후궁으로 둘 수 없고, 아름다운 조나라 여자도 폐하 곁에 두실 수 없습니다. 인물이 좋고 나쁨은 가리지 않은 채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모두 물리치고, 타국 사람은 무조건 추방하면서 여색과 주옥만은 예외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가 용감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에 그렇게 클 수 있었고, 황하는 아무리 작은 시내라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깊을 수 있는 것입니다(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
외국 출신의 인재를 추방하는 일은 그들을 다른 나라로 가게 해서 적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진에서 나지 않는 물건도 소중한 것이 많듯 비록 진 출신은 아니지만, 진에 충성하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외국 출신 인재를 추방하는 것은 안으로는 인재를 버리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한을 사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의 부강과 발전 역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 중에서
이사의 글에 감명받은 진시황은 곧 축객령을 거둬들이고, 그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그의 정책이 중용 받은 것은 물론이다. 천하 통일의 원대한 구상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진시황에게 ‘기회를 잡으면 절대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라는 속전속결의 논리와 한나라부터 쳐야 한다는 단계적 통일론을 제시했다. 또한, 군사력 강화와 함께 6국 내부의 적을 활용하는 뇌물 전략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시대 흐름과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은 그의 통찰력과 탁견으로 인해 진나라는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나라와 진시황을 무너지게 한 사람 역시 이사였다.《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를 보면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제언에 따라 시황 34년(기원전 213년)에 분서를 명령하고, 다음 해에는 학자 460여 명을 땅에 묻어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이 사건은 진나라의 멸망은 물론 후세에 시황제를 깎아내리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조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순혈주의에 집착해 외부인을 배척하는 조직이 아직도 꽤 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은 철저히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리더 역시 적지 않다. 과연, 그런 조직과 리더가 원하는 만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리더는 다양한 사람을 아우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모든 선과 악,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직이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