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입맛은 까탈스럽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성향과는 다르게 시골스러웠다.유복하던 시절, 입맛 까다로운 막내아들의 입맛에 어쩔 줄 몰라하던 할머니는 각종 특별난 음식들로 아들의 사랑을 표현하곤 했다.
그 음식들은 주로 시골스러운 향토 음식들이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아버지는 그 음식들이 그리울 때면 그 맛을 직접 재현해 내곤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직접 해 주던 음식 중에 열무비빔밥은 나에게 더욱 특별한 음식이다.
엄마의 열무김치는 지금처럼 자극적이고 선명한 빨간 고추가 들어가지 않고,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에 열무 자체에서 우러난 자연적인 국물이 어우러진 깔끔하고 담백한 물김치였다. 자작할 정도로 물을 넣어 담아내는 열무김치가 익어 갈 때쯤, 우리 집 밥상은 지겹도록 열무 비빔밥이 비벼졌다.
엄마표 열무 물김치가 없으면 아버지의 열무 비빔밥은 완성이 될 수 없었다. 참 안 맞는 사이 같은데 , 또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는 부부 사이였다.
큰 양동이에 흰 밥을 듬뿍 덜어내어 담고, 그 위에 가위로 잘게 썰어진 열무김치와 고춧가루로 버무려 낸 새빨간 콩나물 무침이 서로 뒤섞여 어우러진다.
그 사이에 잘 끓여진 살짝 되직한 두부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양념으로 넣고 비빈다.
마지막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내면 아버지 열무 비빔밥이 탄생된다.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결혼 전과 다름없이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삼십이 훌쩍 넘어 결혼을 한 딸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가졌으니, 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학업과 일을 하느라고 결혼이 늦어지고 숱한 연애도 결혼과 연결되지 못하자, 아버지는 노심초사 하루하루 술로 달래고 있었다.
여자가 결혼해서 설거지 통에 손이나 담그고 사는 것은 부당하다며, 여자도 배우고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아버지였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모자랄 데 없는 딸아이의 결혼이 늦어지자, 아버지도 딸 가진 다른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너무 잘나서 결혼을 못하나!
너무 못나서 결혼을 못하나!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무거운 표정으로 단 번에 아버지의 슬픔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고 데리고 온 남편을 보자마자 ,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무심하던 엄마도 옆에서 덩달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웃음이 지금은 눈물로 바뀌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그러했다.
그렇게 결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아이가 생기자 아버지는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았다.
나는 세상에 없는 공주였고, 아버지는 세상에 없는 머슴이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게 하지 않았고, 나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늙은 부모님으로부터 나왔다. 세상의 모든 호사는 다 누렸던 시기였다.
유난히 첫애때는 조심할 것이 많았다. 나이가 많아 고위험군에 들어가는 임산부라 그저 조심하는 일밖에 없었다.
커피를 마시면 아이가 까매진다는 속설을 듣고 그 좋아하던 커피를 끊으려고 했지만, 그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어 아침이 되면 아버지의 커피로 잠을 깰 수 있었다. 그 속설은 그저 속설일 뿐인 것이 아들은 우유빛깔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먹던 음식이 임신을 해서도 생각이 났었는데 그중에 아버지의 열무 비빔밥은 거의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열무 비빔밥이 먹고 싶은 날이면, 아버지는 완전히 다 비벼 놓고 숟가락만 얹으면 먹을 수 있도록 예쁜 그릇에 담아 다소곳이 나의 방에 들어와 내 코 앞에 가져다 놓고 나간다.
그렇게 열무 비빔밥만 달고 살던 내가 서울에서 첫 아이를 낳자, 그 병원이 떠나가라고 아버지가 만세를 불렀다.
아들이라는 소리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해당층에 근무하던 모든 간호사들에게 음료수를 다 돌렸던 아버지..
미국에서 일하던 남편이 나오지 못해, 아버지가 손자를 받아서 늙은 남편으로 오해를 받았던 아버지..
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란 그 손자가 지금 스무 살이 되었다.
유난히 작게 태어난 아들에게 부정이 탄다고 손자를 목욕시킬 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은밀하게 목욕을 시켰다. 유난히 작은 갓난쟁이가 혹시나 감기에 걸릴까 방안에 온도를 올리고 신주 모시듯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씻기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감긴 후, 마른 수건으로 감기에 걸리지 않게 머리를 감싸고 난 후 다시 몸을 씻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목욕 의식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아무도 그 옆에 다가가지 못했다.
결혼생활 중 나의 유일한 호강은 아이 셋의 목욕을 직접 시키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의 목욕만큼은 나보다 아버지와 남편이 훨씬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각별한 손주의 사랑에도 아들의 사춘기 반항은 남들보다는 심하지 않았지만, 유난히 똑똑했던 아들의 반항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헛된 사랑은 없듯이 아들이 첫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자, 아들의 첫마디가 할아버지에게 돈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에게만 거금 300불을 보내주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았던 아들. 할아버지와 약속했던 원하던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을 때, 할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린 것 같아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온 날 눈이 퉁퉁 불어 터지도록 울었던 아들.
그런 아버지가 대상포진에 걸려 오른쪽 팔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나의 아버지가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마음은 다른 자식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난히 고통스럽다.
밤만 되면 팔의 통증이 더해 고통스러워 다른 식구들의 잠을 다 깨워 놓는 아버지.
긴 병에 장사 없다고 잠이 깰 무렵 살짝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할아버지와 한 방을 쓰면서도 그 흔한 지천 한마디 하지 않았다. 유난히 냉정한 아들은 할아버지에게만은 자신의 마음을 내 보인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날 때, 나는 아버지를 집에서 배웅을 한다. 항상 마지막일 것 같은 아버지와 딸의 헤어짐은 가슴을 쥐어짤듯한 먹먹함을 안겨다 주었다.
어느 날부터, 하얀 백발의힘없는 발걸음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아버지를 배웅하러 공항을 나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떠나는 날은 집에서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해, 남편이 아버지를 모시고 공항으로 가는 차가 집을 떠나자마자, 나의 통곡이 시작된다.
이런 나의 슬픔을 아는지 아들은 나 대신 자신이 공항을 다녀오겠다고 자청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떠난다.
그 이기적인 아들이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눈이 발갛게 충혈이 되어 돌아온다.
아들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던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절대로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물질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정신적 풍요를 이길 수가 없다. 나의 경우엔 그러했다.
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란, 큰 아들의 방황은 길지 않았다.잠시 이탈했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엄마의 걱정과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키고, 자기가 갈 길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나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결코 그 사랑을 외면하지 않았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기다림이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기다렸듯이 나는 나의 아들을 기다렸다.
제대로 된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세상 안에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영어 단어 하나의 입력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올바른 사랑 한 스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