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seniya Oct 22. 2022

충정로 해물 짜장면

80년대 후반에서 90년 초반에 대학을 다니던 세대들에게 재수학원이란 고립된 또 하나의 사회였다.

같은 졸업반 동기들 중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친구들은 낯선 섬에 고립되어 이리 지도  저리 가지도 못하는 허공에 붕 떠 있는 신세였다. 지은 죄도 없이 벌 받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갓 대학에 들어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동기들을 거리에서 보는 날에는  어깨의 무게와 머리가 밑으로 더욱 처지는  순간들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한, 거무죽죽한 옷들의 색깔로만 봐도 알 수 있는 패배감. 그와는 대비되는  승자의 얼굴과 옷차림은 밝은 봄날의 날씨만큼이나 싱그럽고 화사로웠다. 새내기 신입생들이 학기초에 들어가 연신 미팅으로 분주할 때,  가엾은 우리들은 학원과 집을 오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단순한 생활들이 연속이었다. 


피가 끓는 심장을 가진 20대 초의 젊은이들을 가두어 놓은 닭장 같은 곳. 그러나 같은 신세끼리 모인  재수학원에도   다른 세상이 있었다. 갓 졸업한 스무 살의 기죽은 청춘들이 모여, 또다시 그들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학교 못지않은 사랑과 설렘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실제로 이어지는 커플들도 생겨나기도 했다.




나 역시도 예상된 결과였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아이러니 한 생각을 가지고 다시 재수학원을 등록하였다. 그러나 나의 재수는 남들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계집애가 무슨 재수를 하면서 지 대학을 가느냐며, 돈이나 벌어 시집이나 가라는 엄마의 차가운 냉대와 반대 속에서 나의 반란도 만만치 않았다. 머리를 자르는  초강수를 두며 반항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세련된 찬성이 엄마의 날 선 반대와 맞물리면서 그 의견은 좀처럼 결론이 나지를 않았다. 경제적으로 힘든 집안의 상황으로 봐선 엄마의 의견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자르면서 까지 저항을 해 보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절망적인 순간, 비밀스럽게 접힌 쪽지가 내 방 한가운데에 던져졌다. 아버지는 성난 나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나의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타박함과 동시에  공부를 하려고 결심을 했으면 머리를 차라리 삭발을 해야지 어중간하게 그 머리 모양이 뭐냐며  희망적인 냉소를 보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의 손에 의해 머리가 좌우되어 한 번도 그전까지는 미장원을 가 본 적이 없었다. 머리에 아주 민감한 아버지는 여자의 우아함은 머리 모양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쪽지의 내용은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승낙이었다.

나의 머리를 한 번 더  믿어보겠다는 불안한 믿음을 마무리로 말이다.



그렇게 나의 재수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엄마 몰래 학원비를 고이고이 모아놨다가 어김없이 나에게  전달되는 과정들이 다달이 첩보작전처럼 진행되었다. 그때는 엄마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가 모를 리 만무했다. 조용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속아주는 엄마의 무심한듯한 넓은 아량을 너무나도 늦게 알아차려버렸다.


도둑이 천성을 못 버리듯,  나는 재수학원에서도 역시나 물 만난 고기처럼 살맛 났다. 공부는 뒷전이고 같은 무리들로 이루어진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기 있는 강사의 강의는 항상 만원이어서 매일 같은 얼굴들이 겹치는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입시학원가로 대치동이 유명하다지만, 그 당시에 입시학원은 종로학원을 비롯해서 서대문 근처나 서울역 입구에 많이 산재해 있었다. 종합반인 남산 근처 정일학원에서 부족한 과목을 다시 메우기 위해 단과학원인 연세학원이나 서울학원을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단과학원의 양대산맥인 연세학원과 서울학원 역시 나의 구역인 서대문구에 위치해 있었다.


여학교만 다녀서 남자들과 한데 어울려 공부한다는 것이 다소 어색했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생기면 그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인연이 없어서 그런 건지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건지,  서로가 서로를 의식은 하지만 결코 가까워지는 법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썸 타는  시간들은  아련하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보충강의가 시작되는  이른 새벽에 각층마다 설치되어 있는 커피 자판기는 젊은 청춘들의 설렘을 대변해 주는 훌륭한 무대장치다. 386세대들에게 자판기 커피란 아날로그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임과 동시에 수많은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서로의 강의시간과 강의실을 알고 있는 눈빛과 눈치는 서로를 찾는 분위기다. 커피를 핑계로 삼삼오오 그들의 무리들을 대동하고 모여든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눈으로는 외면한 듯 서로의 몸짓에 반응하던 시절이었다.


내겐 너무나 멋졌던 그 친구..

바보스러움과 날카로움의 중간쯤의 묘한 매력을 가진 하얀 은테와 꺼벙이처럼 큰 키에 항상 자킷에 청바지만을 입었던 그 남자아이. 항상 같은 청자켓에 청바지를 고집했다.

  여러 벌의 같은 옷을 가지고 번갈아 입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가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연세학원과 서울학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하던 그날도 나는 서울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쉬는 시간에 들려오는 방송에서 낯익은  이름이 울려 퍼진다.

정확하게 나의 이름이었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밑으로 내려오라는 방송이었다.

놀랍기도 하고 뜬금없기도 한 마음으로 내려가 보니 다름 아닌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움과 놀라움,  두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부르니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열심히 공부하는 딸이 보고 싶기도 하고 혹시나 넉넉지 않은 용돈에 밥이라도 부실하게 먹을까 봐 궁금해서 왔단다. 내가 수하던 시절 서대문에서 오빠가 다니던 학교로 식구들이 수원으로 잠시 이사를 간 적이 있었다. 의를 듣기 위해선 나는 그 오래된 동네를 뒤로 하고 지하철로 수원과 서울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딸을 보기 위해 수원에서 서울까지 행차를 한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같은 처지의 수강생들은 나와 아버지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학원에서 나름 유명인이었지만,  아버지의 낯선 방문은 그날 이후 두 학원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렸다.


 딸을 보기 위해 아버지는 연세학원을 먼저 찾았다.

연세학원에서도 내가 없는 사이 방송으로 내 이름이 온 학원 안에 퍼져 나갔나 보다.

아버지가 을 애타게 찾고 있는 사이 나와 친한 친구가 나의 부재를 알려주며, 옆에 위치한 울학원에 있노라고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단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기에 가능한 서사다.


이리하여 아버지와 딸의 사이가 학원가에서는 부러운 부녀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나의 아버지 같은 상이 평범한 아버지 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감정표현에 충실한 아버지의 이런 행위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길에서도  아버지와 허리를 감싸포옹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부녀 사이,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사랑한다는 말 마디 듣기가 쉽지 않았던, 내 친구 미자는 그 모습을 너무나도 부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난다는 친구였다. 아버지는 나의 친구들에게도 다정했다.


미자와 나를 데려간 곳은 충정로 역과 연결되어 있던 종근당 빌딩 안의 중국집이었다. 넓고 화려한 그 중국집은 내가 생각했던 중국집이 아니었다. 내가 오래 살았던 동네였지만, 그 동네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 처음 안 것은 그것 말고도  짜장면에 새우가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새우가 들어간 짜장면을 시켜주고 난 후,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작은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몰래 주는 용돈..... 그 이상의 사랑 표현이 있을까!!!!


짜장면에 들어간 새우는 아버지의 비밀 아닌 마음 레시피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